수원지방도(지나조선고지도) 1623년. 28.5 × 31.0 cm. (자료=국립중앙도서관)
수원지방도(지나조선고지도) 1623년. 28.5 × 31.0 cm. (자료=국립중앙도서관)

수원은 사도세자의 묘 이장으로 인해 구읍이 오늘날의 팔달산 지역으로 이전하게 됨으로써 만들어진 신도시이다. 이런 연유로 ‘수원’이라고 하면 ‘정조대왕’이 함께 떠오른다. 이번 회에서는 수원의 옛지도에 기록된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며 수원의 역사를 읽어보고자 한다. 

수원지방도(지나조선고지도)1623 : 수원지방을 확대한 지도. (자료=국립중앙박물관)     
수원지방도(지나조선고지도)1623년 : 수원지방을 확대한 지도. (자료=국립중앙박물관)     

먼저 1623년에 출간된 지나조선고지도(支那朝鮮古地圖)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수원 한남수성 매홀 수성 수주’ (水原, 漢南隋城, 買忽, 水城, 水州) 라고 적고 있다. 수원은 한강 이남의 수성이라고 했다. 삼국시대 고구려 땅 일 때는 매홀(買忽)로 불렀다. 

이후 신라가 통일한 757년(경덕왕16)에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됐다. 고려 때는 수주(水州)가 됐다. 수원이 된 것은 1310년(고려 충선왕 2년)이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수원도호부 수원군 수원부로 끝의 고을 단위 명칭만 바뀌었을 뿐 수(水)자로 이어졌다. 

수원부(팔도군현지도)1760,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수원부(팔도군현지도)1760년,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수원부(팔도군현지도) 1760 : 수원부근을 확대한 지도.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수원부(팔도군현지도) 1760년 : 수원부근을 확대한 지도.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1760년에 발행된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 수원부 지도에 의하면 오늘날 화성이 있는 곳에 광교면(光敎面)이라고 표기돼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760년대 제작된 여러 지도에도 광교면이 표기돼있어 화성건설 이전 오늘의 수원은 광교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지도의 중상단부 남쪽인 청호면(靑好面) 청호산(靑好山) 오늘날 오산부근에서 붉은 색의 도로가 두 갈래로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왼쪽의 도로를 따라 정림면(正林面)을 거쳐 독산성(禿山城) 옆을 지나 하천을 지나면 붉은 원이 그려져 있다. 이곳이 구 수원읍치(水原邑治)이다. 

도로는 다시 북쪽의 후평(後坪)을 거쳐 호매절면(好梅折面)을 지나 미륵당(彌勒堂)을 거쳐 광주로 넘어간다. 그리고 오른쪽의 붉은색 도로는 청호산 오른쪽에서 북쪽의 중미(中美) 태촌면(台村面)을 향한다. 이어 하천을 넘나들며 북쪽의 유천(柳川)을 거쳐 수원과 광주경계인 미륵당을 넘어 광주로 연결된다.

이 지도상 두 선의 도로는 조선시대 6대로중 제5대로에 속하는 한양에서 제주도를 연결하는 제주대로를 표기한 것이다. 왼쪽도로는 제주대로가 수원 구읍치로 연결된 도로이다. 오른쪽의 도로는 직선으로 표기돼 있음을 비춰볼 때 제주대로의 본선임을 알 수 있다.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은 이 부분을 반계수록에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형원은 1670년에 완성한 그의 저서 『반계수록』 「보유(補遺)」에서 수원의 읍치를 북평으로 옮기고 성지(城池)를 건축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일찍이 새로운 활동을 위한 도시로 수원의 중요성을 간파한 듯하다. 또한 구 수원읍의 지형으로는 그 기능을 다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구읍은 우선 교통측면에서도 직선 길에 비해서 한참을 우회해야 했다. 그리고 산으로 둘러 싸여 옹색한 형국이었다. 반계는 그보다 북쪽에 넓게 열려진 새 터전으로 수원을 옮길 것을 주장한 것이다.
 
『반계수록』에 실린 유형원의 주장을 살펴보면 새 읍치에 관련된 것이 보인다.
“북쪽 들 가운데 임천의 지세를 보고 생각하건데, 지금의 읍치도 좋기는 하나 북쪽의 들은 산이 크게 굽고 땅이 태평하여 농경지가 깊고 넓으며 규모가 크고 멀어서 성을 읍치로 하게 되면 참으로 대번진이 될 수 있는 기상이다. 그 땅 내외가 가히 1만호는 수용할 것이다.”

반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은 120년이 지나서였다. 1789년 7월 11일 금성위(금성위) 박명원(朴명원) 상소로 사도세자의 묘가 구읍 화산으로 이장됐기 때문이다. 현륭원(顯隆園)의 조성은 구읍의 이전을 전제로 하였기에 신읍이 오늘의 수원에 건설된 것이다. 

구읍은 양택(陽宅)이라기보다 음택(陰宅)으로 적합한 곳이었다. 구읍 화산(花山)은 800개의 꽃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형세이며 용이 똬리를 틀고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인 반룡농주(盤龍弄珠)의 형상을 한 천하명당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수원부(해동지도)1750 : 옛 수원읍은 꽃잎 형상을 하고 있다.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수원부(해동지도)1750년 : 옛 수원읍은 꽃잎 형상을 하고 있다.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 후 5일이 지난 1789년 7월 15일부터 구읍의 이주가 시작됐다. 사도세자 묘 이장일은 같은 해 길일인 10월 7일로 정해졌다. 사도세자 묘 이장일이 결정됨으로써 구읍이전은 묘 이장일 전까지 마쳐야 했다. 
 
그래서 묘터 조성과 구읍 이전을 책임진 당시 조심태 부사는 마음이 다급했을 것이다. 당시의 기록인 『수원부하지초록(水原府下旨抄錄)』 9월 28일자에 의하면 수원부사 조심태는 정조대왕에게 최종보상 대상은 319호라고 보고한다.
 
이때 보고된 보상추진 상황을 살펴보면 돈을 받지 않고 머물기를 원하는 집이 16호, 이미 돈을 받고 이사를 하지 못하는 집이 119호였다. 이후 구읍의 이주관련 기사는 보이지 않으나 사도세자 묘 이장 일이 10월 7일로 정해졌기에 이장일 이전에 마무리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구읍 이주가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1790년 7월 15일자 수원부사 조심태가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수원부 읍내민호(邑內民戶)를 호구마다 적간(摘奸)하여 구읍에서 이사 온 민인(民人)469호에게 모(牟) 2석(石)씩, 원래 거주하고 있는 민인(原居民人) 63호, 이사 온(遷徙) 협호민인(挾戶民人)46호, 타지방에서 이사 온(他移來) 인민(人民)141호 등에 호구마다 모(牟)1석씩 마련하여 도합 719호에게 모 1,188석을 나누어 지급했다.’고 적고 있다.

이로써 신읍조성 1년이 되는 1790년 7월 15일 신읍 거주 호수는 719호였음을 알 수 있다.
화성성역이 끝나고 정조는 5~6호 밖에 안 되던 곳이 이제 1천호가 살고 있어 어엿한 도회지가 됐다고 관계자들을 위로했다. 따라서 1790년에는 이미 어느 정도 도시의 모습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수원부지도 1872.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수원부지도 1872년.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수원부지도. 1872 : 수원부근을 확대한 지도 .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수원부지도. 1872년 : 수원부근을 확대한 지도 .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당시 행궁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리(北里) 남쪽은 남리(南里)라 했다. 1793년 수원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首府)로 개명해 승격을 하게 된다. 정조는 화성이 준공되자 한양의 예에 따라 종로네거리를 중심으로 북리는 북부(北部)로, 남리는 남부(南部)로 고쳐 부르게 했다. 1906년(광무10)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 졌을 때는 북부는 북부면(北部面)이 되었고 남부는 남부면(南部面)이 됐다.

1931년 4월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됐다. 1945년 해방이 됐고 1949년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됐다. 외곽 지역은 화성군이 됐다. 당시 수원시청은 수원읍사무소를 시청사로, 화성군청은 수원군청을 청사로 사용했다. 화성군청은 1970년 오산읍으로 이전했다. 

1988년 수원시는 구(區)제도가 도입됐다. 당시 북쪽은 장안구, 남쪽은 권선구가 됐다. 구(區)경계는 종로 사거리와 행궁진입로였다. 결국 화성이 조성될 때 남리 북리의 경계가 구(區)의 경계가 됐다. 

1993년 팔달구가 신설 때 화성북쪽의 신안동은 원래대로 장안구가 되었다. 남쪽의 화성행궁 남쪽 팔창동과 남향동은 팔달구가 되었다. 이후 2003년 11월 영통구가 신설될 때 화성안 동네는 팔달구로 일원화 되었다. 2007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화성 내 3개 동사무소가 행궁동으로 통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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