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동탄신도시 석우동에 노작 홍사용문학관이 있다. 2010년 3월 18일 개관한 노작문학관에서는 낭만주의를 선도한 대표적인 시인이자 연극인이었던 노작 홍사용 선생의 정신을 따라 문학과 연극의 활성화를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노작문학제, 노작문학상, 창작단막극제, 문예강좌, 팟캐스트, 방학 청소년 문예교실, 문학현장답사, 산유화 극장정기공연, 우리동네 작은영화관, 시인과 함께 걷는 시숲길, 문학이 함께하는 음악회, 시민극단 산유화 운영...

지난 3월 6일엔 화성 지역문학관을 개관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문학관 2층에 개관한 화성 지역문학관에서는 ‘화성 문학에 길을 묻다’라는 주제의 첫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오는 7월 31일까지 진행되는 이 전시의 주제는 ‘상실과 회복’이다. 코로나19가 앗아간 일상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하는데 홍신선의 ‘돌모루 이장의 마지막 편지’, 최두석의 ‘농섬’, 홍일선의 ‘동탄행버스’ 등 화성 각 지역의 역사를 노래한 작품들과 도서가 함께 전시되고 있다.

내 사진과 육필원고도 전시되고 있다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 푸르디 푸른 30대 시절 수원의 문인들과 융릉에서 개최한 백일장과 정남 보통리 저수지에 모인 문인들의 사진을 보냈다. 스캔 받아놓은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지금은 온통 백발이 됐지만 30대의 나는 검은 머리였다. 나보다 10살 많은 시인 임병호 형님도, 내 또래의 진순분 시인도 모두모두 푸릇푸릇했다. 지금은 80을 바라보는 수필가 김애자 선생님도 청춘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화성 정남면 보통리 저수지에 모인 수원의 문인들.(사진=김우영 필자)
젊은 시절 화성 정남면 보통리 저수지에 모인 수원의 문인들.(사진=김우영 필자)

이 사진과 나의 친필 시를 전달하고 난 얼마 후 계간지 ‘백조’ 담당자로부터 시 2편을 달라는 청탁서가 왔고 며칠 전엔 내 졸시 ‘그날, 병점역에서’ ‘다시, 병점역에서’가 실린 ‘백조’ 2021년 여름호가 왔다. 원고료도 제법 나왔다. 이게 얼마 만인가. 시를 써주고 원고료를 받은 것이...남의 시를 받아다 발표시켜주고 원고료를 챙겨줄 줄만 알았는데 내가 쓴 시의 원고료가 들어오니 기분이 좋아져 일부는 아내 용돈으로 줬다.

‘백조(白潮)’는 1922년 배재학당과 휘문의숙 출신의 젊은 문학인들이 만든 문예동인지였다. 내년이면 창간 100주년이다. 고등학교 때 한국문학사를 공부하면서 ‘창(조), 개(벽), 폐(허), 장(미촌), 백(조), 금(성), 영(대)...’이라며 문예지 발간 순서를 외웠다. 그러니까 당시 배우기로 백조는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서 다섯 번째로 창간된 문예지라는 것이다.

홍사용을 비롯, 나도향·박영희·박종화·이상화·현진건 등 당대 청년 문학인들이 창간한 백조는 한국 근대 낭만주의 문학 운동을 선도했던 잡지였다. 백조는 창간 당시 계몽주의적인 문학잡지들 사이에서 새로운 성격을 띤 문예지로 문단의 변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창간호에는 홍사용의 서시 ‘백조(白潮)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 박종화 시 ‘밀실로 돌아가다’, 나도향 소설 ‘젊은이의 시절’ 등이 실려 있다. 격월간으로 계획됐지만 1922년에 1~2호, 1923년에 3호를 내고 발행은 중단됐다.

복간된 백조 2020년 겨울호. (사진=노작 홍사용문학관 제공)
복간된 백조 2020년 겨울호. (사진=노작 홍사용문학관 제공)

그리고 2020년 ‘백조’는 복간됐다.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고향의 대선배 시인이 주도했던 그 잡지가 복간된 것만 해도 기쁜 일인데 내 시까지 수록해줬으니 담당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특정 출판사나 문단에 얽혀있지 않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노작은 문학 활동과 신극운동을 하면서 몇 년 사이에 무려 1400여석이나 되는 전답을 모두 팔았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에 거금 5만원을 냈다는 설도 있다. 한국 현대문학과 연극을 이끈 거장이었지만 지역에서는 그를 기억해주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찾는 이도 없었고 그 흔하디흔한 시비조차 없었다.

1984년 5월 26일 노작 홍사용 시비건립위원회는 석우리 묘소에 '노작 홍사용 시비'를 세웠다. 당시 경인일보에 '내 고장의 맥'이란 기획시리즈가 있었는데 어경선기자인지 김용환기자인지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노작의 묘역이 너무 초라하다는 기사를 썼고 이를 본 지역 문학인을 비롯, 뜻있는 이들이 시비건립에 나섰다. 당시 백수에다가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던 나도 건립위원으로서 기금 몇 만원을 냈다. 당시 결혼식 축의금이 2천원~3천원 정도였는데 직장도 없었던 내가 낸 몇 만원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이후 화성시가 적극 나서 노작문학관을 건립하고 노작문학상을 제정됐으며 노작공원도 조성했다. 이제 문예지 ‘백조’까지 발행되고 있으니 감회가 깊다.

코로나19 백신 예방 접종을 했으니 가까운 날에 걷기 좋아하는 이들과 노작문학관과 묘소를 찾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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