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산 항공사진. (사진=화성사업소)
팔달산 항공사진. (사진=화성사업소)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팔달산을 오르다 길옆에 널찍하게 잘 생긴 돌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예사돌이 아니었다. 돌탑의 탑신부 옥개석이었다. 돌탑은 제일 아래 부분에 기단부가 있고 그 위 중간부분에 탑신부, 상단에 상륜부가 있어 세 부분으로 나뉜다. 

팔달산 탑신 사진. 성신사 옆길.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산 탑신 사진. 성신사 옆길. (사진=김충영 필자)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03년 6월 화성사업소가 설립돼 화성사업에 전념할 시기에 다시 팔달산을 오르게 됐다. 돌탑 탑신이 잘 있는가 살펴보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떤 눈 밝은 사람이 보고는 팔달산에 오르다 힘들면 앉아서 쉬어가라고 초록색 페인트칠을 해놓은 것이다.

아마 그 사람은 팔달산을 관리하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사람은 그것이 돌탑의 탑신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월이 20여년이 지난 5월 25일 김우영 수원일보 논설위원을 만나 국밥을 함께 들면서 요즘 글 쓰는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러던 중 예전에 팔달산에서 탑신을 발견했노라고 운을 떼니 자기도 2군데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는 탑신을 찾아가 보자고 했다. 김우영 논설위원이 찾은 위치는 예전 수원상업전수학교 자리 현재 테니스장 바로 아래 부분 성벽 옆이라고 했다. 

 

테니스장 부근 성벽옆 탑신1(콘크리트). (사진=김충영 필자)
테니스장 부근 성벽옆 탑신1(콘크리트). (사진=김충영 필자)
테니스장부근 성벽옆 탑신2(콘크리트). (사진=김충영 필자)
테니스장부근 성벽옆 탑신2(콘크리트).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문에서 출발해 팔달문 안내소 앞을 거쳐 성 밖으로 나가 성곽을 따라 100여 미터를 오르니 테니스장 바로 아래 성벽 옆에서 옥개석 2개가 풀숲에 묻혀 있었다. 참으로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나온 김에 예전에 찾았던 탑신도 찾아보자고 해 가봤다. 예전에 칠해놓았던 페인트는 20여년이 지나서 모두 씻겨나가고 대신 이끼가 무성했다. 

이렇게 해서 필자와 김우영 논설위원이 팔달산 돌탑의 탑신 옥개석 3개를 찾음으로써 팔달산의 옛 이름이 '탑산'이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필자는 팔달산에서 내려오면서 바로 탑산과 팔달산의 유래에 대한 글을 순식간에 물 흐르듯이 썼다. 

필자는 지난 6월2일 운동도 할겸 사진도 다시 찍으려고 팔달산을 다시 찾았다. 이번 코스는 회주도로에서 테니스장을 따라 내려갔다. 테니스장을 지나자 성곽주변의 잡풀을 제초한 흔적이 보였다. 그래서 풀섶을 다시 헤치지 않아도 탑신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탑신이 얼마나 묻혔는지 갑자기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탑신을 힘줘 당기자 힘없이 뽑히는 것이었다. 그리 크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속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철사도 보였다. 최근에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실망하고 내려오면서 김우영 논설위원에게 이런 일도 있었다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수원일보에 보낼 기사송고를 멈추고 ‘옛 지도에 기록된 수원역사 읽기’ 기사를 먼저 송고했다. 하마터면 오보를 내보낼 뻔했다. 아무튼 그동안 팔달산이 고려시대에는 탑산이었는데 탑 하나 없는 산이 어떻게 탑산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다소나마 풀렸기를 기대해 보는 심정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팔달산을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참에 탑산(塔山)이 팔달산(八達山)이 된 유래를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날의 수원을 만든 사람이 정조대왕이라면 정조 이전의 수원은 이고(李皐, 1338~1420) 선생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생의 본관은 여주이고 호는 망천(忘川)이다. 고려 말 문신으로 1374년(공민왕23)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한림학사를 거쳐 1389년(공양왕1)에 사헌부 집의에 올랐다. 

이후 정국이 혼란하자 집현전 제학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수원으로 낙향, 탑산에 은거하며 스스로 망천(忘川)이라 호를 짓고 세상 일을 잊고 살았다. 공은 이집(李集), 조견(趙狷)과 함께 고려 삼학사(三學士)로 불렸다. 고려 공양왕은 신하를 보내 '요즘 무엇을 하면서 지내냐'고 안부를 물으니 ‘집 뒤의 탑산에 올라 사방을 굽어보면 사통이 팔달하여 마음의 눈을 가리는 것 없어 아주 즐겁다’고 답했다고 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그를 조정에 등용시키기 위해 관직을 제수하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조는 "공이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 출사하지 않느냐"며 화공을 보내 그림으로 올리게 했다. 그림을 받아 본 태조는 "역시 사통팔달해 거칠 것 없는 아름다운 산"이라며 탑산을 팔달산(八達山)이라 사명(賜名,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정조대왕은 선생이 살던 집터를 고려 효자가 살던 곳이라 해 학사대(學士臺)를 세웠다. 또한 공이 마시던 우물을 학사정(學士井)이라고 명했으며, 공이 낚시 하던 반석에 조대(釣臺)라는 문구를 새겼다. 이고 선생이 시름을 잊은 하천이라 하여 망천(忘川)이라 했다. 

팔달문사진. (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문사진. ( 사진=김충영 필자)
권선구청 표석사진. (사진=김충영 필자)
권선구청 표석사진.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구청 표석사진.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구청 표석사진. (사진=김충영 필자)

공(公)은 팔달산 자락에서 살다가 적사리(赤寺里)로 이사를 해서 학당을 열어 '착하게 살아라. 즉,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항상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였다'고 하여 권선리(勸善里)라는 지명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1988년 수원에 구청 제도가 시행되면서 권선(勸善)을 구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1993년에는 수원에 장안구와 권선구에서 1개구가 증설됐는데 수원 화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라 해서 팔달구(八達區)로 명명했다. 또한 공(公)이 살던 옛터에 심은 은행나무를 수원시 보호수 2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수원시는 광교산(산51-1)에 있는 공의 묘역을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했다. 

이고(李皐)선생 신도비. (사진=김충영 필자)
이고(李皐)선생 신도비. (사진=김충영 필자)

한편 문중에서는 1970년 6월 23일 학교법인 광인학원 설립허가를 받았다. 이어 1970년 12월 26일에는 수원공업고등학교 설립허가증을 발급받았다. 이윽고 인계동 언덕에 이고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수원공업고등학교는 1971년 3월 2일 입학식을 하게 됐다.

수원공업고등학교의 설립은 올곧은 선비정신을 계승한 수원의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 김충영 도시계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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