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편입된 정조로와 행궁길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광장에 편입된 정조로와 행궁길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행궁 복원 사업은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 수원문화원장을 하던 1989년 초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향토사학자 고 이승언(본명 이한기, 당시 시흥군지 상임편찬위원)씨가 서울대 규장각에서 원색 '화성행궁도'를 발견한 이후부터 시민운동으로 전개됐다. 이후 경기도립병원 신축계획이 발표되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우선은 도립병원을 행궁터에 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과제였다, 

경기도립병원. (사진=화성박물관)
경기도립병원. (사진=화성박물관)

행궁복원 추진위원회는 도립병원을 정자동 연초제조창 옆으로 옮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심재덕 원장은 행궁터에 위치한 신풍초등학교 출신이다. 그래서 화성행궁 복원에 더 애착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이후 민선1기 수원시장에 당선된 심재덕 시장은 본격적으로 행궁복원사업에 매진한다. 

1995년 행궁복원사업의 첫 삽을 뜬 후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데 전념했다. 그리고 1997년 12월 6일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행궁복원을 시작한지 7년이 경과한 2002년 1단계 복원사업이 완성 단계에 이르자 화성행궁의 위용이 드러났다. 

완공 단계인 화성행궁.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완공 단계인 화성행궁.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그러나 구 국도였던 장안문~팔달문 도로에서 행궁을 볼 수가 없었다. 이는 종로사거리에서 행궁사이의 150m 구간에 4~5층의 빌딩 숲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시민들, 특히 화성을 연구하는 모임인 (사)화성연구회 회원들의 염려가 컸다. 

첫째는 화성행궁을 큰길인 구 국도를 지날 때 화성행궁이 보이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둘째는 앞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것이고 행사 또한 많아질 것인데 이러한 수요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행궁앞에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장을 만들 때 부작용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조로에서 바라본 행궁길과 행궁. (사진=김충영 필자)
정조로에서 바라본 행궁길과 행궁. (사진=김충영 필자)

첫째는 조선시대엔 광장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행궁진입도로가 없어지게 되면 사거리가 삼거리가 돼 화성행궁의 원형이 왜곡되는 것이다. 세번째는 광장이 만들어질 경우 행궁이 왜소해진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광장이 만들어지면 시위장소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김충영의 수원현미경’ 21번째로 연재된 ‘옛지도로 읽는 수원의 역사’ 내용이다. 행궁 앞길은 팔달산 아래에 신도시가 조성된 후 광교면이 남리(南里) 북리(北里)로 바뀐 것을 시작으로 일곱번 이나 행정구역이 변동되는 격변의 1번지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궁앞길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았다. 1795년 윤2월 9일부터 행해진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때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기록이다. ‘대가(大駕)가 장안문으로 들어가 종가(鍾街)를 지나 좌우 군영의 앞길과 신풍루 좌익문을 지나 중양문(中陽門) 으로 들어서서 봉수당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화성전도 2000년 모사본. (자료=화성박물관)
화성전도 2000년 모사본. (자료=화성박물관)

그리고 1796년 축성이 끝나고 1801년(순조1)에 출간(出刊)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당시 화성의 모습을 담고 있는 ‘화성전도’가 있다. 이 자료와 1911년 작성된 측량원도 등을 보면 일본인들이 화성행궁을 훼손하기 이전 행궁주변의 모습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도성의 궁궐 앞에는 6조(六曹)거리가 형성됐다. 지방고을 관아 앞에는 시전(市廛)이 형성되었다. 화성행궁 앞길에는 당시 화성을 지키던 장용영(壯勇營)과 관련된 관청들이 들어섰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신대학교 유봉학 교수는 행궁 앞에 초관청(哨官廳) 토포청(討捕廳) 방영청(防營廳) 별효사청(別驍士聽) 별군관청(別軍官聽)이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화성행궁 복원전 모습. (사진=화성박물관)
화성행궁 복원전 모습. (사진=화성박물관)

정조 사후 장용영이 혁파됨에 따라 군영은 다른 용도로 전환됐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제강점기 화성행궁 봉수당은 자혜의원으로 사용됐다가 후일 경기도립병원이 됐다. 우화관인 객사에는 수원보통학교가 들어섰고, 북군영에는 경찰서가 들어섰다. 남군영에는 토목관구가 들어서면서 모두 헐리게 된다. 

인근 이아(貳衙)자리에는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이 들어섰다. 그리고 종각 맞은편 중영자리에 수원군청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법원 검찰청은 선경도서관 자리로 이전했다. 법원검찰청이 원천동에 새 청사를 지어 이전하고 인천에 있던 경기도 경찰국이 옮겨왔다.

행궁과 이아, 군영에 행정기관이 들어서면서 행궁길에는 자연스럽게 관청과 관련있는 대서소와 식당 병원 여관 등이 들어섰고 뒤편에는 주택가가 형성됐다. 2002년에 수립된 화성주변정비계획에 행궁 앞에 광장 계획이 반영됐다. 2003년 10월에는 광장조성 기본계획수립을 시작으로 광장조성을 위한 행정절차에 들어갔다. 

광장만들기 전 행궁주변 항공사진, (사진=화성사업소)
광장만들기 전 행궁주변 항공사진, (사진=화성사업소)

이윽고 2004년 7월 손실보상에 착수했다. 보상대상은 54동의 건물이었고 토지는 약 7천평이 대상이었다. 화성주변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여있어 불이익을 많이 받은 주민들이다. 그러나 광장에 편입된 주민들은 수원시가 추진하는 화성사업에 묵묵히 협조해주었다. 

몇 사람은 보상가격이 낮다는 이유로 협의 매수에 불응해 토지수용절차를 걸치기도 했으나 대체적으로는 순조롭게 보상이 추진됐다. 

광장부지에는 유일하게 행정기관인 수원우체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1895년 9월 28일 한성우체국수원지사로 개국해 광장사업을 추진하던 2005년까지 110년이 된 수원우체국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수원시에서 행궁 앞에 광장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수원우체국으로는 청천병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수원우체국 100주년 표석.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우체국 100주년 표석. (사진=김충영 필자)

당시 수원우체국에서 소포실장을 했던 김석규 씨는 경인일보에 기고한 '아! 수원우체국 수원우체국이여!'라는 기고문을 통해 안타깝고 속상하고 허탈한 심정을 적고 있다. 우체국은 단순한 정부기관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통로였다고 했다. "오직 글로 마음을 전할 수 없던 시절, 사랑과 그리움 때로는 애련함과 비통함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적고 있다.

당시 화성사업소장인 필자가 우체국장을 만나러가도 자리에 없다고 만나주지 않을 정도로 우체국측은 섭섭해 했다.

화성행궁 광장을 만든이야기(2) <행궁광장을 만들면 시위 장소가 된다고?>는 다음호에 계속된다.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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