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정비계획에 반영된 조감도. (자료=화성사업소) 
화성정비계획에 반영된 조감도. (자료=화성사업소) 

행궁광장 조성사업은 광장구역을 정하는 일부터 시작됐다. 행궁길을 중심으로 북쪽은 신풍학교 정문 앞 도시계획도로까지 정했다. 남쪽은 수원우체국 뒷골목까지 구획했다. 이렇게  하여 2002년 화성주변 정비계획에 기본 안을 담았다. 

2003년 10월 광장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행궁진입로를 중심에 두고 검토한 결과 대칭이 되지 않아 남쪽을 북쪽의 거리와 같게 확장을 했다. 이렇게 한 것은 한옥거리를 광장외곽에 배치해 관광객 편의시설을 조성하고 광장을 아늑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시 계획된 조감도. (자료=화성사업소)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시 계획된 조감도. (자료=화성사업소)

이 안을 가지고 문화재청 현상변경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배가 산으로 갔다. 지난 회에 행궁광장을 만든 이야기에서 밝힌 바 있다. 문화재위원들은 광장 조성계획안을 놓고 갑론을박 주문이 많았다.

“광장이 행궁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광장보다 공원개념으로 조성하라” “현 단계에서 확정하기보다 최소한의 시설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옥형태는 행궁에 저해되므로 지양해야 한다” “명당수와 홍살문을 복원해라” “지하공간을 활용하고 지상은 가급적 유보공간으로 두어야 한다. 중앙통로는 판석포장을 하여 자연스럽게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런 사유로 광장에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당시는 예산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게 됨으로 훗날 보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자 했기에 지하 공간 활용을 유보했다. 원래 용역회사와 실무진은 강화토(소일콘)로 광장을 포장하고자 했다. 

행궁광장 최종 조감도. (자료=화성사업소)
행궁광장 최종 조감도. (자료=화성사업소)

그런데 김용서 시장의 의견에 따라 광장 바닥에는 모두 4개의 그림이 설치됐다. 서장대 성조도(17×39m), 신풍루 사미도(16×22m), 낙성연도(16×22m), 봉수당 진찬도(18×39m)의 도자판이 설치됐다. 광장 바닥에 운동장만한 그림이 설치돼 그림을 한눈에 감상하는 것이 어려웠다. 특히 평지에 설치하다보니 그림을 조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림을 양각으로 볼록하게 만들다보니 굴곡이 생겨서 걷기에도 불편했다. 무엇보다도 광장이용에 제약이 많았다. 광장 조성 초기에는 도자판 그림을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이 했다. 그나마 도자판이 떨어져 굴러다니지 않는 것은 도자판 두께를 5cm로 하여 보도블록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광장옆 신풍지구 개발전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광장옆 신풍지구 개발전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광장에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되자 광장이 너무 넓게 만들어져 행궁과 부조화를 보였다. 그리고 광장과 접한 부분은 불량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광장 옆에 기념품점 하나 없는 모습은 황량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광장에 조성하지 못한 관광객 편의시설을 광장 옆에 단지로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했다. 

그래서 광장 남·북에 도시개발사업을 추진했다. 시장에게 나의 이런 생각을 말했다. 시장은 예산은 조달할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도시계획과에서 오랫동안 일했기 때문에 도시개발과에 도시개발특별회계에 여유자금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예산을 사용하면 된다고 답했다.  

광장 남북 신풍지구 개발 구상도.  (자료=화성사업소)
광장 남북 신풍지구 개발 구상도. (자료=화성사업소)

그래서 도시개발 특별회계 예산을 투입하기로 결정됐다. 이 사업은 돈을 잠시 빌려 사업을 한 뒤 토지를 재매각해서 원금을 갚는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행궁광장 남쪽과 북쪽 3천 여 평을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해 토지와 건물보상을 완료 한 후 대지조성사업이 완료됐다. 

대지 조성사업을 추진하던 2007년과 2008년은 그동안 추진했던 여러 사업들이 마무리되는 시기였다. 여민각 중건사업, 서장대 복원사업, 광장조성사업, 화성홍보관(관광센터), 수원호스텔이 마무리돼 화성사업의 전성기를 이뤘다.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악재도 밀려왔다. 첫째는 대한주택공사와 협약을 체결해 추진하던 화성 내 재개발사업이 무산된 것이다. 

두 번째는 서장대 주변의 소나무를 정리한 사업이었다. 이 두 가지 사업은 많은 민원이 발생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나는 화성사업에 발을 들여 놓은 지 12년 만에 화성과 결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화성사업의 아쉬움을 남겨두고 2009년 7월 1일 화성사업소장에서 시청 건설교통국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언젠가 로마 바티칸에 갔을 때다. 시스티나성당 천장에 미켈란제로가 그린 천지창조 그림이 있었다. 그런데 한쪽 귀퉁이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몇 백 년이 돼 그을리고 퇴색된 부분이 많아 원형복원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복원기간이 5년이 걸리는 사업이라 복원사업은 천장 전체를 가리지 않고 작업을하고 있었다. 

이유는 아주 작은 범위로 세밀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구태여 가리지 않고 해도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작품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해 보았다.  화성은 누구의 작품인가? 화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정조대왕 작품이다. 그렇다면 화성을 복원하고 정비함에 있어 원작자의 의도를 배려했는가? 

행궁광장 및 신풍지구 종전 지적도. (자료=화성사업소)
행궁광장 및 신풍지구 종전 지적도. (자료=화성사업소)

행궁광장을 계획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6년이 걸렸다. 나는 한시도 행궁광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조대왕이 만든 도시를 더 잘 만들겠다고 지우개로 지우고 엉뚱한 그림을 그리게 했다. 나의 한계였음을 인정한다.

수원 아이파크 미술관 전경.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 아이파크 미술관 전경. (사진=김충영 필자)

그동안 화성사업소를 떠난 뒤 많은 사람들과 화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광장이 너무 커서 황량하단다. 미술관도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느냐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이제 광장이 조성된 지 13년이 됐다. 광장조성 20년이 될 즈음에는 주변과 잘 어울리는 광장 모습을 기대해 본다.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다음호는 ‘서장대를 복원한 이야기- 지금의 서장대는 다섯번째 지은 것’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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