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대 전도. 화성성역의궤. (자료=화성박물관)
서장대 전도. 화성성역의궤. (자료=화성박물관)

민선4기 6.13지방선거가 40여일 남은 2006년 5월1일 새벽 1시경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당직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장대에 불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급히 서장대에 올랐다. 이미 서장대는 2층 누각에 불이 퍼져 활활 타고 있었다. 소방차가 서장대 주위를 에워싸고 화재진압을 하느라 아수라장이었다. 

소방차 다섯대가 물을 뿜어대자 불은 어느 정도 잡힌 듯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불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원인은 서까래 위에 있는 적심(서까래와 기와사이에 있는 나무층)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기와가 있어 물을 아무리 뿌려도 물이 속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소방 책임자가 지붕을 뚫고 물을 뿌려야 불이 꺼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불을 완전히 진화할 수 있었다. 

화재후 처참한 서장대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화재후 처참한 서장대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새벽이 되자 팔달산 뒤에 있는 서문파출소에서 범인을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마터면 6.13지방선거의 단골 메뉴가 될 뻔 했는데 다행히 범인이 현장에서 검거돼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을 낸 사람은 만석공원에서 술을 먹었다고 한다. 팔달산을 바라보다가 서장대가 아름다워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단다. 서장대까지 걸어와서 서장대 계단을 오르니 문루2층에 자물쇠가 잠겨 있어 오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인근에서 돌을 주워와 자물쇠를 부수고 2층에 올라가 군복(순라복)을 입고 목검을 휘둘러보았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기 몸에 귀신이 붙은 것 같아 꺼림칙하였단다. 그래서 입었던 군복을 벗어 2층 마루에 놓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소각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나일론 옷에 불이 붙자 순식간에 2층 마룻바닥에서 천장으로 옮겨 붙어 2층과 지붕이 전소된 것이다. 취객은 불이 난후 서장대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서문 파출소 경찰관에 의해 검거됐다. 

서장대는 1794년 8월 11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착공됐다. 이어 9월 16일 상량식을 올리고 13일 만인 9월 29일 서장대는 착공한지 48일 만에 완공됐다. 서장대는 조선말 국력이 쇠락하면서 관리가 되지 않아 무너져 내렸다.

1796년 지은 서장대. 관리가 되지않아 무너져 내리고 있다. (자료=화성박물관)
1796년 지은 서장대. 관리가 되지않아 무너져 내리고 있다. (자료=화성박물관)

서장대의 첫 번째 복원은 1971년이라고 경기도가 편찬한 '복원정화지'에 기록돼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당시 경기도 문화재과에서 문화재업무를 담당했던 이낙천 전 화성연구회 이사장이 알고 있을까 해서 전화를 드렸다. 그러자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세번째 서장대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세번째 서장대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1971년 당시 경기도에서는 서장대의 중요성을 감안해 제일먼저 서장대와 서노대 복원을 추진했다고 한다. 1973년 서장대 공사가 끝날 무렵 낙뢰로 서장대의 중심부인 절병통과 고주가 파손됐다. 당시 준공검사가 안 된 시점이라서 시공자에게 하자보수를 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자 시공자는 낙뢰는 하자가 아닌 천재지변임을 주장해 하는 수 없이 예산을 세워 서장대 해체 복원 공사를 했다고 한다. 세 번째 소실은 1994년5월7일 화재로 인한 것이다. 2층 부분이 완전히 소실되고 1층은 부분적으로 훼손됐다. 완전해체 후 1994년 12월 5일 네 번째로 복원됐다. 

네 번째 서장대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네 번째 서장대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네 번째 소실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취객의 실수로 인한 것이다. 이후 서장대는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원형의 모습을 되찾았다. 서장대 복원공사는 화재 이후 2006년 5월 10일 설계용역을 실시했다. 2006년 8월 3일 공사를 착수, 2007년 4월 6일 준공 고유제를 올렸다. 복원공사비는 총 7억원이 들어갔다. 국비가 5억원, 시비 2억원이 들었다.

다섯 번째 서장대. (사진=김충영 필자)
다섯 번째 서장대. (사진=김충영 필자)

서장대 관련 일화가 있다. 2012년 환경국장 시절 수원시 요식업조합회원 연찬회가 남이섬에 있어서 참여한 일이 있다. 점심을 먹고 남이섬을 한 바퀴 도는데 저만치에 한옥건물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서장대였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2006년 5월 1일 화재 이후 서장대를 해체해서 사용할 부재와 사용이 불가능한 부재를 선별해서 한쪽에 쌓아 놓았다. 

어느 날 김용서 시장한테 전화가 왔다. 불이 나서 못쓰게 된 부재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폐기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김문수 도지사가 전화를 했는데 못 쓰는 나무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탄 나무를 준 기억이 났다. 

나무를 가져간 사람은 남이섬 전 대표인 강우현 사장(전 경기도자재단 대표이사)이었다. 강사장은 남이섬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든 분이다. 서장대가 불난 것을 보고 못 쓰는 자재를 가져다가 남이섬에 서장대를 복원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남이장대(남이섬 장대 이름)를 꼼꼼하게 살펴  보았다. 서장대 목재는 보이지 않았다. 

남이섬에 있는 서장대(남이장대). (사진=김충영 필자)
남이섬에 있는 서장대(남이장대). (사진=김충영 필자)

아마도 강우현 대표는 불탄 서장대 나무를 사용해서 짓겠다는 기발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실제로 사용할 만한 자재가 없자 온전한 나무를 사용하여 장대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불탄 나무를 얇게 켜서 몇 군데 덧붙인 것이 보일 뿐이었다.

또 다른 사건은 2008년 설날연휴 마지막 날 저녁에 발생한 숭례문 화재사건이다.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의 어처구니없는 방화에서 비롯됐다.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오후 8시 50분경 숭례문 주변도로를 지나던 택시기사가 최초 119에 신고한 후 8시 53분경 소방차가 현장에 도착, 누각으로 진입해 진화를 하였다. 

그러나 상부 지붕 속까지 옮겨 붙은 불은 완전히 진화되지 않았다. 당시 방송3사가 실시간 중계를 했다. 불과 1년반전 서장대 화재당시 현장에서 진화를 지켜보았던 나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당시 나의 생각은 국보1호이고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화재인데 금세 진화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화재이후 복원된 숭례문. (사진=필자 김충영)
화재이후 복원된 숭례문. (사진=필자 김충영)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불이 번졌다. 불이 진화되지 않고 불길이 천장까지 번지자 고가차와 굴절차를 동원해 지붕과 처마에 대량으로 물을 뿌리는 것이 생생하게 실시간 중계됐다. 화재를 지켜보던 나는 ‘아! 불을 잡기 위해서는 지붕을 뚫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숭례문이 국보1호라서인지 누구도 지붕을 부수는 지시를 하지 못한 것이다. 

온 국민이 중계를 바라보는 상황에서 새벽 1시 56분 2층 문루가 무너져 내렸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자 TV카메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원 서장대는 어떻게 해서 전소되지 않았냐는 것이다. 숭례문 화재로 수원 서장대와 나는 TV 단골 출연자가 됐다.

수원은 서장대 화재이후 CCTV, 열 감지센서 설치와 24시간 순찰을 강화했다. 숭례문 화재로 더욱 보강해 방염처리와 24시간 감시하는 상황실을 설치했다. '순사 열명이 도둑하나 못 지킨다'는 속담이 있다.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다음호에는 ‘서장대 현판이야기’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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