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하루걸러, 또는 이틀 걸러 자주 만나던 ㅇ, 화성 서쪽 먼 곳으로 이사한 뒤로는 1년에 한번 전화나 할 정도로 뜸해졌다.

그는 2006년 막걸리 양조장을 차렸다. 대부도의 폐업 양조장을 임대해 막걸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맛이 매우 좋았다. 몇 잔 마시면 배가 부른데다 취기도 기분 좋게 올라와 늘 그 막걸리만 찾았다. 이름하여 ‘광교산 막걸리’.

마니아들도 꽤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매출이 떨어지더니 그예 문을 닫고 말았다. 참 아쉬웠다. 그간 내가 마셔봤던 막걸리 중 최고였는데... 옷가게를 하던 ㄱ은 아예 한 박스씩 들여놓고 단골손님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진 광교산 막걸리가 놓인 술자리. (사진=김우영 필자)
지금은 없어진 광교산 막걸리가 놓인 술자리. (사진=김우영 필자)

나는 막걸리를 사랑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일산 호수공원에서 열린 '대한민국 막걸리축제'에까지 가서 전국의 유명 막걸리들을 모두 마셔봤을 정도다. 자주 만나던 수원의 막걸리꾼 몇이 함께 가서 나름 점수를 매겨보기도 했는데 신기하게 1~3위까지 일치했다.

그리고 그해 호평을 받았던 상주의 양조장까지 방문했다. 주인으로부터 떡 벌어진 한상을 받고 잠자리까지 제공받았다. 이듬해 양조장 주인 가족이 수원을 방문했을 때는 나혜석거리에서 우리가 한턱냈던 추억도 있다. 그 양조장 주인 내외 건강하신가?

막걸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렸을 때 술심부름을 하며 조금씩 맛을 보다가 술맛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중엔 거의 반주전자를 먹고 취해서 쓰러져 동네 어른 등에 업혀 오기도 했다. 그 뒤부터 술심부름의 즐거움은 내 동생들 차지가 됐다.(동생들 역시 술심부름 중 취해 논두렁에 잠들기도 했다고 들었다.

막걸리는 참 오묘한 술이다. 소주나 맥주, 양주나 와인은 늘 그 맛이다. 그런데 막걸리는 ‘5미(味)’라 하여 다섯가지 맛이 난다. 단맛, 쓴맛, 신맛, 떫은 맛, 청량감 등이다. 신맛도 두 가지로 나뉜다. 시큼한 맛과 잘 익은 과일의 맛이다. 숙성 기간과 온도에 따라 다양한 맛이 난다.

한번은 단골 막걸리집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퇴근하자마자 빨리 오라는 것이다. 요즘말로 ‘인생막걸리’를 만났다는 소리에 서둘러 도착하자마자 큰 잔에 막걸리부터 따른다. 아무 소리 말고 우선 마신 다음에 이야기 하자는 것이다.

과연, 인생막걸리라 할 만 했다. 분명 ㅇ이 만드는 막걸리인데 잘 익은 사과향이 가득 나는 것이다. 이 상태가 조금 더 지나면 식초가 된다. 서해안 사람들이 집에서 만들어 생선회와 함께 먹는 막걸리식초 말이다.

어린 시절 서해안에 살던 한 친구는 술 많이 마시는 아버지가 보기 싫어 막걸리에 그 식초를 몰래 한 방울 씩 떨어트렸다고 한다. 그러면 삽시간에 식초에 가까운 상태로 시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얼마 전 역사학 박사인 ㅎ이 집으로 불렀다. 오리숯불구이와 함께 막걸리를 내놓았는데 그 종류가 자그마치 10개가 넘었다. 이름깨나 난 우리나라 막걸리들은 모두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맛볼 기회가 없었던 전북 정읍의 송명섭 막걸리도 있어 반가웠다. “과연...” 소문과 다르지 않은 좋은 술이었다. 아스파탐 등 인공 첨가물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물맛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어렸을 때 술심부름 하며 마셨던 그 맛이 살아 있었다.

술의 출처를 물으니 얼마 전 화성행궁 유여택에서 열린 문화재청 주관 ‘막걸리 빚기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기념행사’ 때 구입했다고 한다.

그래? 그거 참 이상도 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막걸리파인 내가 어째 그 소식을 몰랐을까나? 김현모 문화재청장도 오고 김영진·김승원 지역 국회의원과 이동수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장, 정규성 (사)한국막걸리협회 회장 등도 참석할 정도로 큰 행사였다는데.

아쉽다. 10년 전만 해도 전주에 자주 내려갔다. 주말 오전에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전주역에 내리면 오후가 된다. 어슬렁어슬렁 막걸리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겨 문을 연 막걸리 집으로 들어선다. 기본 술만 시키면 쉴 새 없이 술상을 뒤덮는 안주들의 행렬에 행복했다. 덜 취하면 그날 밤차로 올라오고 만취하면 전주에서 잤다. 다음날 단골 식당에서 콩나물 해장국이나 아욱국으로 해장을 한 뒤 수원으로 올라오곤 했다.

전주 막걸리 골목이 부러웠다. 수원에도 그런 집들이 있었으면...또 부러웠던 것은 전주와 인근 완주에서 생산되는 맛있는 막걸리들이었다. 수원엔 왜 그런 막걸리들을 만나기 어려울까.

한때 수원에는 9개의 양조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수원시에는 ‘수원백미탁주’를 만드는 수원양조장과 ‘수원화성막걸리’를 생산하는 동네방네 영통동 양조장 밖에 없다. 광교산 하광교동 자선농원의 ‘휴동막걸리’는 가수 겸 배우 김창완 등 마니아들이 선호하는 막걸리지만 양조장은 수원 밖에 있다.

머지않아 행궁동(북수동)에서 수원지역 쌀(효원 쌀)을 주원료로 한 막걸리 ‘행궁둥이’를 생산한단다. 생산하는 즉시 맛을 볼 작정으로 미리 신청해놓았다.

비가 오니 또 한잔 생각이 난다. 아, 그런데 이번 주부터는 오후6시 이후에 2명까지만 만날 수 있단다. 누굴 불러야 하나? / 김우영 논설위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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