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장대 현판. 정조 친필이다. (사진=화성박물관)
화성장대 현판. 정조 친필이다. (사진=화성박물관)

화성(華城) 성 쌓는 일은 1794년 정월 초 7일 석재 뜨는 일로 시작됐다. 서장대는 1794년 8월 11일 터 닦기에 들어가 같은 해 9월 16일 상량식을 올리고 13일 만인 9월 29일 완공됐다. 서장대는 화성시설물중 동장대와 더불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서장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굽어보면 모두 석성의 봉화와 황교(皇橋)의 물로 통하여 마치 돗자리를 깔아 놓은 듯하니 한 성의 완급과 사벽(四壁)의 허실은 마치 손바닥 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산을 두르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모두 앉은 자리에서 제변(制變) 할만하다. 그래서 드디어 여기에 돌로 대(臺)를 쌓고 위에 층각을 세웠다. 문지방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 화성장대(華城壯臺) 편액을 붙였다."

정조는 수원화성 건축물 중 중요한 몇 개를 직접 글을 썼다.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奉壽堂)에 먼저 걸렸던 화성행궁 현판(1793년1월)과 봉수당의 옛 이름인 장남헌(壯南軒) 현판(1790년2월), 혜경궁 홍씨가 머물렀던 장락당(長樂堂), 1790년 원행당시 활 4발을 쏘아 모두 맞춘 것을 기념하여 내린 득중정(得中亭) 현판, 행궁의 내당인 복내당(福內堂) 현판을 직접 썼다.

정조는 화성시설물 중 유일하게 화성장대(華城將臺) 현판을 직접 썼다. 이는 1795년 을묘년 수원행차 때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쓴 것이다. 현판 좌측 하단에 규장지보(奎章之寶) 인장이 새겨져 있다. 많은 시설물중 서장대 현판만 직접 쓴 것은 서장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서장대의 첫 번째 복원은 1971년이다. 이는 서장대의 중요성을 감안해 화성이 복원 되기 전 추진된 것이다. 1973년 서장대 공사가 끝날 무렵 낙뢰로 중심부인 절병통(節甁桶)과 고주(高柱)가 파손돼 불가피하게 해체 복원됐다. 

서장대 2번째 현판, 박세림 서예가의 글).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서장대 2번째 현판. 박세림 서예가의 글씨.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당시 한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서장대 복원업무를 담당했던 이낙천 전 화성연구회 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인천 출신 박세림 서예가의 글이라고 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글 현판을 선호했다. 그 중에서도 서예대가인 인천 출신 박세림의 글씨를 좋아 했다고 한다. 

당시 소전 손재형 선생이 한글과 한문글씨의 대가였다. 문하에 서희환이 소전으로부터 사사받아 한글을 발전시켜 국전 최초로 한글이 대상을 받았다. 박세림 역시 소전과 서희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세 번째 소실은 1994년 5월 7일 화재로 인한 것이다. 이때 2층 부분이 완전히 소실됐다. 현판도 소실됐다. 1층은 부분적으로 훼손돼 완전 해체해 1994년 12월 5일 네 번째로 복원됐다. 현판은 양근웅 선생이 썼다. 양근웅 선생은 필자의 스승이다. 

1988년 7월1일 수원에 구청제도가 도입됐다. 당시 필자는 도시계획계 차석을 하다가 도시계획계 옆에 있는 구획정리계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시청 현관 오른쪽에는 민원실인 시민과가 있었고, 왼쪽에는 민원업무가 많은 도시과가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자주 뵐 수 있었다. 하루는 찾아뵙고 서예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시청에 서예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룹을 만들어 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청 홈페지에 서예 클럽회원을 모집한다고 하니 30여명이 신청했다. 

스승도 있고 학생도 모집되니 남은 것은 한 가지, 교실만 해결되면 실행이 가능하게 됐다. 건물 관리를 맞고 있는 회계과 영선계장을 찾아갔다. 가능한 방이 있다는 것이었다. 4층 대강당 뒤편에 다목적실로 사용하는 20평 남짓의 방이었다. 시청내 남는 테이블과 의자를 구해 서예실을 만들 수 있었다. 선생님은 '수원시청 서우회'라는 글을 써주셨다.

수원시 서우회 족자.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시 서우회 족자. (사진=김충영 필자)

당시 수원시 서예클럽은 회장도 없었다. 앞장선 필자가 총무를 보면서 이끌었다. 서예를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나자 선생님께서 “이제 호를 지어줘야겠는데...” 하셨다. 며칠이 지나자 호를 지어가지고 오셨다. 일파(一坡)라고 지어 오셨다. 선생님께 일파 뜻을 여쭈었다. 글 그대로 한 일(一), 언덕 파(坡)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일파(一坡) 김충영 작호(爵號) 족자. (사진=김충영 필자)
일파(一坡) 김충영 작호(爵號) 족자. (사진=김충영 필자)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지은 것이니까 쓰기 싫으면 안 써도 된다고 하셨다. 그 후 선생님께서 도움을 청하면 먹을 갈아드리고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하루는 서장대 현판인 화성장대(華城將臺)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역사적인 현판 글을 쓰는 현장에 있었다.  

네 번째 서장대 현판. 필자와 양근웅 선생님 사진이다. (사진=행인 촬영)
네 번째 서장대 현판. 필자와 양근웅 선생님 사진이다. (사진=행인 촬영)

네 번째 서장대 소실은 전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취객의 실수 때문이었다. 이 때 스승이 쓴 화성장대 현판도 함께 불에 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후 서장대는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원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 함께 근무하던 학예사인 김준혁 박사가 화성사업소장인 필자의 방을 찾아 왔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정조가 친필로 쓴 화성장대(華城將臺) 편액이 있다고 했다. 

현재 화성장대 현판. 정조대왕 친필 모사본이다. (사진=김충영 필자)
현재 화성장대 현판. 정조대왕 친필 모사본이다. (사진=김충영 필자)

그 전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다. 하늘이 정조대왕의 친필 편액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하라고 서장대가 화재를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국립고궁박물관에 협조요청을 해 원본 현판을 모사해 정조대왕의 친필 현판을 걸 수 있었다. 정조대왕의 친필 현판이 걸리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것이다.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다음호에는 '서장대는 수원의 등대이다'가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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