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박물관에서 바라본 서장대와 팔달산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박물관에서 바라본 서장대와 팔달산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행궁광장 조성공사가 한창이던 2008년 봄이었다. 김용서 시장이 행궁광장 공사 현장을 방문했다. 이때 광장 맞은편에서는 종각 중건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팔달산에 있는 서장대는 취객의 방화 이후 해체 복원공사가 2007년 4월에 준공한 상태였다. 

행궁광장에서 팔달산을 바라보니 서장대가 2층 누각과 지붕만 보였다. 나는 평상시 생각하고 있던 서장대 주변 소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서장대가 복원되었는데 산 아래에서도 안보이고 서장대에서도 시내가 보이지 않으니 이를 어떻게 하지요?”라고 물었다.

소나무에 가려진 서장대 주변모습. (사진=김층영 필자)
소나무에 가려진 서장대 주변모습. (사진=김층영 필자)

시장은 “그럼 좋은 방법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서장대 소나무는 심재덕 시장이 취임하고 얼마 안돼서 키가 큰 소나무를 반으로 전지한 것인데 10여년이 지나자 다시 자라서 저렇게 무성해졌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참에 서장대 주변 소나무를 정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김 시장은 “말이 많을 텐데...”라고 우려했다. 심재덕 시장도 그 점을 염려해 소나무 중간 부분을 전지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서장대 소나무 정리사업은 ‘일을 만들어서’ 진행하게 됐다. 먼저 소나무 정리작업의 기준을 세웠다.

첫째, 소나무는 가급적 베지 않고 옮기는 조건이었다. 둘째, 불가피한 경우에만 정리한다는 조건이었다. 불가피한 경우는 돌 틈에 있어서 분뜨기가 어려운 경우와 수형이 안 좋은 잡목인 경우로 정해 진행했다. 

소나무 이식 작업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소나무 이식 작업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산에 이식된 소나무.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산에 이식된 소나무. (사진=김충영 필자)

소나무 이식은 서장대가 있는 윗부분부터 차례로 정리해 나갔다. 분을 뜬 소나무는 팔달산과 성곽주변에 이식됐다. 나는 팔달산에 올라가 조망을 보면서 작업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 2008년 화성문화제 이전에 150여주를 정리했다. 

그런데 회주도로변과 북동쪽의 활엽수림이 있어 팔달산 아래서 서장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리한 경계지점에 있는 나무가 밀식된 상태에서 노출이 되자 아주 흉하게 보였다. ‘쇠뿔도 당긴 김에 빼라’는 속담이 생각났다. 어떤 일이든 하려고 생각했으면 한창 열이 올랐을 때 망설이지 말고 곧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친김에 2009년 3월, 조망에 장애가 되는 나무를 추가로 정리하게 됐다. 

그러자 팔달산에 올라왔던 사람들로부터 민원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특히 나의 친구인 경기데일리 박익희 기자가 기사를 썼다. “팔달산을 망치는 것 아니냐, 장마가 오면 어떻게 감당할 것 이냐, 전시행정 아니냐. 예산과 행정 낭비다” 등... 많은 민원도 쇄도한다고 했다. 자청해서 한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미처 몰랐다. 

소나무 정리 작업전 팔달산과 서장대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소나무 정리 작업전 팔달산과 서장대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소나무 이식 후 서장대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소나무 이식 후 서장대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당시 ‘내가 너무 과했나’하고 후회도 했다. 비가 많이 와서 산사태가 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도 했다. ‘행궁광장을 만든 이야기’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서장대 주변 소나무 정리를 계기로 나는 의욕을 상실하게 됐다. 

화성축조 당시 팔달산 소나무와 관련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1789년 화산으로 이전했다. 동시에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5년 뒤인 1794년 성곽을 쌓기 시작, 2년 8개월만인 1796년 9월 10일 성역을 마무리했다.

현륭원 일대 나무심기를 마친 정조는 화성을 축성하며 대대적인 식목과 조경정책을 시작했다. 우선 성내 매향동과 팔달산 등지에 소나무들을 심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 물자로 쓰기 위해 팔달산 소나무를 베어가기 전까지 팔달산은 송림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수원천 양쪽에 버드나무를 심어 제방을 튼튼하게 하고 경관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1980년 노송지대 모습. (사진= 이용창 사진작가)
1980년 노송지대 모습. (사진= 이용창 사진작가)

성 밖으로 나가 용연과 관길야와 지금의 노송지대 등지에 많은 소나무들을 심었다. 이 일은 매년 봄과 가을 정조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됐다. 자신이 내려오는 행차길에 소나무를 심어 나무의 중요성을 온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수원의 발전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정조는 특히 뽕나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화성유수 조심태에게 신도시 화성에 뽕나무를 파종하게 했다. 파종한 뽕나무를 행궁 근처와 성 밖의 밭두둑에 심게 했다. 이 나무들은 한국전쟁 전까지 유지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훼손되고 땔감으로 사라지게 됐다.

팔달산 소나무와의 인연은 50여 년 전 수원공고에 입학한 1971년 팔달산의 추억이 생각난다. 당시 팔달산에 강감찬 장군 동상이 건립되던 시기였다. 봄이 되자 팔달산 송충이 잡기 행사가 있었다. 당시는 환경오염이 심각하지 않은 시절이라서 인지 유난히 송충이가 극성을 떨었다. 팔달산에 있던 소나무는 고등학생 키를 조금 넘는 크기였다. 

한국전쟁이후 수원 팔달산과 광교산모습. (사진=화성박물관)
한국전쟁이후 수원 팔달산과 광교산모습. (사진=화성박물관)

송충이를 잡기 위해서는 왼손으로 소나무 중간쯤 잡고 당기면 휘어져 쉽게 잡을 수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팔달산과 광교산이 나오는 항공사진을 보면 나무 한그루 없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팔달산의 소나무는 한국전쟁 이후에 사방사업 일환으로 식재된 나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팔달산의 소나무는 조밀하게 식재돼 경제수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팔달산 소나무 정리 작업은 올해로 13년이 됐다. 이제는 작은 나무들이 제법 서장대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서장대는 화성축성 이래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수원의 등대 역할을 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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