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사 800년 넘은 향나무. (사진=김우영 필자)
봉녕사 800년 넘은 향나무. (사진=김우영 필자)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나빠졌다. 40대 초반부터 눈에 노화현상이 일어나더니 50대엔 기어이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늘 손닿는 곳에 놓여 있던 책들이 멀어졌다. 30분만 읽어도 눈이 아프니 독서가 겁이 난다.

글 쓰는 일이 먹고 사는 일이 돼 버려서 할 수없이 하루 몇 시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하니 눈은 점점 침침해지고 있다.

명색 글쟁이가 글 읽는 것을 두려워하다니... 이런 슬픈 일이 내게도 벌어지다니...

그러나 어쩌랴,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을.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나이 들면서 겪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그럼에도 반드시 읽는 글이 있다. (사)다산연구소에서 보내주는 칼럼들이다. 다산연구소는 수원 팔달구 인계동 경기문화재단 내에 있다. 필진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포진해있다. 특히 박석무 송재소 김준혁 김태동 김성수 등의 글은 무릎을 치며 거듭해서 읽는다.

이번 제1173회 필자는 (사)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이다.

‘늙은 노인이어서 유쾌한 일’이란 제목의 칼럼인데 다산 정약용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라는 시를 소개하고 있다.

늙으면 여섯 가지가 유쾌해진다는 내용이다. ‘불쾌’가 아니라 ‘유쾌’다.

첫 번째, 머리칼이 모두 빠져 민둥머리로 변해, 머리 손질하는 불편이 없어져 유쾌하다.

두 번째, 이가 모두 빠지면서 치통의 고통을 당하지 않아 유쾌하다.

세 번째, 시력이 약해져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없어, 책 읽는 고통에서 벗어나니 유쾌하다.

네 번째, 청력이 약해져 귀가 어두우니 듣기 싫은 소리를 안 들어서 유쾌하다.

다섯 번째, 나이 먹어 글 짓는 격식에 구애받지 않아, 그냥 내키는 대로 글이나 시를 지을 수 있으니 유쾌하다.

여섯 번째 늙으면 바둑을 두어도 반드시 이겨야 할 필요가 없어, 하수들만 상대하게 되니 그것도 유쾌한 일이다.

늙는 것이 유쾌한 일이란다. 머리칼이 빠지고, 이가 빠지고, 눈과 귀가 어두워지니 유쾌하단다. 물론 역설적이고 해학적인 시다.

박석무 선생은 이 가운데 네 번 째 귀머거리(耳聾)시에 마음이 기운다고 했다.

세상 소리는 좋은 소리 없고(世聲無好音)

모두 온통 시비(是非) 다툼이로다(大都皆是非)

선생은 “막말과 속된 말들이 세상에 가득 차면서 어떻게 해야 저런 소리의 해악에서 벗어날까를 걱정하고 살아가는데, 귀가 어두우면 유쾌해진다는 다산의 역설이 마음에 와 닿는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다산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는 내게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 이가 많이 빠져나간 나는 요즘 치통의 고통을 당하지 않아 좋다. 물론 음식물을 씹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조금만 더 빠지면 틀니를 입주시킬 생각이다. 팔달문에서 치과의원을 하는 후배가 임플란트보다는 틀니를 추천해 줬다. 그럼 나도 진정한 ‘틀딱’이 되는 거겠지? 아무리 그래봤자 귀가 어두워 안 들린다, 이놈들아.

시력이 약해졌다는 핑계로 책을 멀리하니 가방이 가벼워졌다. 그냥 내키는 대로 글을 쓰니 이 또한 다산의 시에 공감되는 부분이다.(광교칼럼이 그렇다)

바둑은 두지 않지만 누구를 이기겠다는 호승심이 많이 사라진 것을 느낀다. 마음이 편해졌다. 환갑이 지나면서 이기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이제부터는 여벌 인생’이란 생각이 들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관대해지고 있다. 이건 내 자랑이 아니라 주변인들로부터 들은 말이다.

흠, 이러다가 김가기 선인처럼 우화등선 하는 거 아닌가?

김가기는 신라사람으로 당나라 종남산 자오곡에서 도를 깨달았고 조정의 백관과 구경꾼 등 산골짜기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낮에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자리엔 금선관을 세웠다.

약 10년 전 쯤 서안 여행 중 이곳을 다녀오기도 했다.

종남산은 서안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산 천자곡 꼭대기쯤엔 신라 의상대사가 불경을 연구하던 지상사가 있다. 지상사에서 의상대사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금선관에 들러 김가기 선인도 만났다. 과연 신선들이 모여 살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깨우침을 얻자고 종남산에 의탁할 일은 없을 것이니 빛의 가르침을 주는 광교산에 기대어 사는 것이 육십 대 중반 이 ‘덜늙은이’의 쾌사라고 생각한다. /김우영 논설위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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