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수원천 매교부근 모습. (사진=화성박물관)
1973년 수원천 매교부근 모습. (사진=화성박물관)

수원천과의 인연은 1971년 수원공고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나는 큰누님 댁에서 학교를 다녔다. 큰누님 댁은 인계동 화성역 동쪽의 절벽 아래에 살아서 남문을 나가기 위해서는 현재 구천교 위치에 있던 작은 교량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수원천을 자주 건너다녔다.

화홍문 내도 모습(화성성역의궤). (자료=화성박물관)
화홍문 내도 모습(화성성역의궤). (자료=화성박물관)

1794년 화성건설 당시 수원천을 준설한 뒤 북쪽에는 북수문인 칠간수 화홍문을 축조하고 남쪽에는 구간수인 남수문을 만들었다. 따라서 수원천은 화성의 중심을 흐르는 화성의 일부분인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8년 8월 1일에는 화홍문이 1원 지폐의 도안 소재로 채택될 정도로 국가적 명소였다. 

1910년 12월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홍문이 들어간 1원권 지폐. (자료=화성박물관)
1910년 12월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홍문이 들어간 1원권 지폐. (자료=화성박물관)

그러나 화홍문은 1922년 대홍수 때 문루가 남수문과 함께 유실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수원 유지들은 1932년 수원명소보존회를 결성하고 시민 모금을 통해서 복원했다. 그러나 남수문은 이때 복원되지 못했다.

한국정쟁 이후 수원천 모습. (사진=화성박물관)
한국전쟁 이후 수원천 모습. (사진=화성박물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수원천변에 나무로 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판잣집을 지었다. 나무기둥이 얼기설기 세워서 도시미관을 해치고, 생활 오수를 그대로 방류해 수원천을 오염시켰다.

당시 수원천의 수질은 오늘날보다 훨씬 오염이 심각한 상태였다. 수원시는 1960~1970년대 초까지 여러 차례 무허가 건물 철거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허가 건물은 줄어들지 않았고 수원천 수질 또한 점점 악화됐다. 

1970년대 진행된 수원천 정비사업
정치권에서 수원천 복개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수원시는 1970년 수원천 복개계획을 세우게 된다. 복개를 추진하기 위해서 매교에서 화홍문아래까지 늘어선 무허가 건물을 정비해야 했다. 무허가 건물 소유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옹벽을 설치한 후 천변 양측에 바퀴달린 가건물을 지어 재입주시키는 조건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수원천 정화사업은 1972년부터 추진됐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인력이 부족했다. 수원시는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수원공고에 실습생을 요청했다. 이때 고인이 된 나의 친구 장희창과 몇 명이 수원시청 건설과 하수계에 실습생으로 가게 됐다. 당시의 사업은 천변에 난립한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하천에 옹벽을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1972년 북수동~매교동 구간 1850m를 폭 30m로 복개하는 계획을 세웠다.
수원천을 30m폭으로 복개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많이 들어야 했다. 그래서 후일 복개를 염두 에 두고 옹벽공사가 추진됐다. 수원천 정화사업의 인건비로 밀가루가 지급되기도 했다. 원조사업으로 지원된 것이었다. 이때 재입주한 천변상가는 수원천 복원공사 때까지 존치됐다.

1991년에 진행된 수원천 1단계 복개사업
1970년대 복개를 전제로 정비된 수원천은 이후 선거철마다 재론 되곤 했다. 그런데 88올림픽 을 앞둔 1988년 4월 27일 제13대 국회위원선거에서 복개가 선거 공약이 되면서 재점화됐다. 

수원시는 지지부진했던 수원천 복개 사업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복개를 전제로 한 수원천 하천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해 건설부에 승인신청을 했다. 승인권자인 건설부는 수원성(화성)과 관련이 있으므로 문화재관리국에 협의 요청을 보냈다.

수원천 1단계 복개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천 1단계 복개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문화재관리국이 남수문이 위치한 지동교 위 부분 480m를 제외할 것을 요청하자 건설부는 480m를 제외하고 승인을 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1991년 복개공사가 시작됐다. 명분은 도심교통체증 및 주차난 해소였다. 당시 수원천은 심각한 오염으로 악취가 진동했다. 수원천을 덮으면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원천 복개공사가 진행되자 복개 찬반논쟁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 중심은 수원문화원이었다. 심재덕 문화원장은 수원문화원소식지 ‘수원사랑’을 통해 수원천 복개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수원사랑’ 주간이었던 김우영을 비롯, 김상용 장기주 원치성 등 필진들은 복개의 부당성과 국·내외 하천 복원 선진사례를 취재해 보도함으로써 복개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수원천 2단계 복개 재추진
수원천 복개1단계 복개공사가 진행되던 1992년 12월에 제14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당시 김영삼 후보는 수원천 복개와 팔달산터널을 선거공약에 넣어 당선됐다. 이렇게 되자 문화재관리국이 반대해 누락된 480m구간에 대한 복개가 다시 시동이 걸리게 된다.

수원시는 2단계구간 복개를 추진하기 위해 문화재관리국을 설득했으나 수원시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다. 수원시는 백방으로 2단계구간 추진을 모색했다. 문화재관리국, 건설교통부, 경기도 등을 두드린 결과 묘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하천법에 의한 복개사업이 아닌 도시계획사업에 의한 도로건설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경기도 도시계획위원회에서는 문화재관리국과 협의조건으로 가결했다. 경기도가 문화재관리국에 협의요청을 하자 실사단 4명이 나와서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3명은 당초대로 부분 복개해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1명은 복개절대 불가를 고수했다. 문화재 관리국은 1994년 8월 23일 복개중지와 원형정비를 요청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도 수원천 1단계 복개공사는 1994년 7월말 공사가 완공됐다. 경기도는 1994년 10월 12일 수원천 복개를 위한 도시계획을 결정 고시했다. 

수원시는 도시계획법에 의한 절차를 마치자 즉시 수원천 2단계 복개공사에 착수 했다. 이렇게 되자 수원천 복개 반대 목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1995년 12월에는 수원환경운동센터 사무국장 염태영(현 수원시장)이 중심이 돼 수원경실련, 경기사학회, 수원YMCA 등 15개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수원천 되살리기 시민운동본부’가 결성된다. 

수원천 2단계 복개공사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천 2단계 복개공사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천 되살리기 시민운동본부는 대대적인 수원천 복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수원천 복개도로는 오히려 도심교통난을 가중시키고 심각한 대기오염으로 시민들의 건강만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지방 선거를 앞두고 민자당 이호선 후보는 교통난 해소를 위해 시작한 수원천 복개를 지속 추진하겠다고 했다. 반면 수원문화원장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수원천 복개 반대 운동을 펴온 무소속 심재덕 후보는 수원천 복개 중단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수원시민의 현명한 선택  
민선1기 6.27 지자체장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심재덕 문화원장이 수원시장으로 당선됐다. 심재덕 시장의 당선은 그동안 정치권의 선거공약으로 추진한 팔달산 터널과 수원천 복개를 시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도 있다. 행정이 관주도에서 시민 중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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