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산더의 남수문 사진. (사진=화성박물관)
헤르만산더의 남수문 사진. (사진=화성박물관)

수원화성은 1794년 1월 7일 돌 뜨기를 시작으로 1796년 9월 10일 33개월 만에 완성됐다. 남수문은 1794년 2월 28일 터 닦기를 시작해 한동안 중단됐다가 1795년 11월에 공사가 다시 시작됐다. 이듬해인 1796년 1월 16일 홍예가 완성된 후 3월 25일 공사가 완료됐다.

1800년 6월 28일 정조대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화성은 위상의 변화를 겪었다. 화성은 이후 국력의 쇠락으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손상을 입게 된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의도적으로 화성과 행궁 등 곳곳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일제가 차량 통행을 이유로 4대문 옆을 헐어 길을 만들면서 팔달문과 장안문은 섬이 됐다. 행궁 또한 학교와 병원, 경찰서가 들어서면서 헐어버린다. 팔달문 양옆은 시장을 열기위해 성벽을 철거했다.

화성의 훼손은 인위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남수문의 경우 1796년 3월 25일 완성된 후 50년만인 1846년 6월 9일 큰 비로 수원천이 범람해 무너져 내렸다. 남수문은 훼손 후 2년 만인 1848년에 복원됐다. 이 때 기록은 수원부에서 비변사에 보고한 수원부계록(水原府啓錄;華營啓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수문을 철거해 만든 우수전 뚜껑. (사진=김충영 필자)
남수문을 철거해 만든 우수전 뚜껑. (사진=김충영 필자)

이후 남수문은 1922년 7월 대홍수로 또 무너져 내렸다. 이후 1920년대 중반 무너진 남수문과 팔달문 양옆의 성벽을 철거해 건축 재료로 사용했다. 수원의 옛 그림을 그린 윤한흠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는 남수문을 해체한 다음 장안문~팔달문 사이의 도로를 확장하면서 배수로의 우수전 뚜껑을 만들었다고 한다. 

남수문은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수원천 2단계 복개구간에 위치했다. 수원천 2단계 구간이 복개됐다면 남수문은 영영 복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록에도 지장을 초래했을 것이다. 종국에는 세계유산등록이 무산될 위험성도 있었다.

그래서 심재덕 시장과 수원의 15개 시민단체는 수원천 2단계 복개를 반대했다. 남수문의 복원은 수원천 2단계 구간의 복개 철회가 결정적이었다. 그동안 남수문 복원이 안 된 이유를 살펴보면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겠다.

첫째는 그동안 남수문은 전설 속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성성역의궤’ 기록에만 남아 있었을 뿐 후세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그동안 남수문을 복원할 만한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셋째는 대홍수 때 2번이나 유실됐기 때문이다. 남수문이 대홍수를 이겨낼 단면이 부족했다는 것인데 이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수원에 수원역사박물관과 수원화성박물관이 문을 열게 되자 화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예연구사가 많아지게 됐다. 특히 한동민 학예연구사(현 화성박물관장)는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던 남수문과 매향교, 남공심돈 등의 사진 12매를 입수하게 된다. 이 사진은 1907년 독일인 헤르만산더가 일본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할때 조선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이었다.

헤르만산더의 팔달문 오른편 사진,   사진=화성박물관남수문과 남공심돈, 남암문과 성벽이 보인다.
헤르만산더의 팔달문(오른쪽) 사진. 남수문과 남공심돈, 남암문과 성벽이 보인다. (사진=화성박물관)

위 사진은 헤르만산더의 손자가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기증 자료전 준비할 때 마침 담당자가 한동민 관장의 처남이었다고 한다. 수원사진이 12매 정도 됐었는데 자세한 위치를 모르게 되자 매형에게 묻게 되면서 알게 됐다고 한다.

이 사진이 수원에 알려지면서 수원사회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진은 결국 수원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됐다. 남수문 복원은 화성사업소가 발족한 후 1년이 지난 2004년 11월 남수문터 1차 발굴조사가 실시됨으로써 시작됐다. 이때 발굴은 1911년도에 제작된 지적원도를 근거로 양편에 옹벽이 있는 상태에서 남수문의 실존을 확인하는 발굴사업이 진행됐다. 

그러나 발굴 결과 남수문의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부 성벽부분의 유구가 발견됐을 뿐이다. 이는 그동안 여러 차례 하상정비와 수원천 2단계 복개공사 과정에서 하상부분이 훼손됐기 때문이었다. 발굴결과를 토대로 2006년 12월에는 남수문 복원 타당성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용역이 착수됐다. 

이어 정밀 발굴을 위해 남수문 서쪽에 위치한 사유지를 매입했다. 2009년 4월에는 남수문 2차 발굴이 추진됐다. 발굴결과 남수문 서쪽 부분에서 일부 석렬 유구가 발견됐을 뿐 남수문과 관련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어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남수문 복원 실시설계가 추진됐다. 

남수문 조감도. (사진=화성사업소)
남수문 조감도. (사진=화성사업소)

실시설계의 핵심은 남수문 구간수(아홉 개의 수문)가 대홍수를 이겨내는 배수단면을 확보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천 폭이 고정돼 있어 수문의 크기를 조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홍수 때 안전하게 배수시키는 방법으로 남수문 하부에 부족한 크기의 배수박스(BOX)를 설치하는 안이 제안됐다.

설계가 완료되고 문화재청의 문화재 현상변경허가를 얻었다. 이로써 행정절차가 마무리됐다. 이어 남수문 복원공사가 발주됐다. 남수문 길이는 95척(29.31m), 폭 19척(5.86m), 높이 32.8척(10.14m)으로서 남수문 양측 성곽을 복원하는 공사가 추진됐다. 공사비는 122억원으로 산정됐다. 

화성성역의궤 남수문도. (자료=화성박물관)
화성성역의궤 남수문도. (자료=화성박물관)

공사비 확보가 어려움에 처하자 수원시는 백방으로 사업비 확보에 나섰다. 원군이 나타났다. 그동안 수원역 뒤편에서 스레트공장을 운영한 주식회사 금강이 스레트 공장을 접고 쇼핑센터와 아파트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남수문 복원사업비 확보의 어려움을 알게 된 주식회사 KCC 정몽익 대표이사는 남수문 복원사업비로 60억원을 쾌척했다.

주식회사 KCC의 기부로 남수문 복원 사업은 순조롭게 출발을 할 수 있었다. 2010년 6월 실시설계를 마치고 2010년 9월 10일 남수문 복원공사가 착공됐다. 문화재청은 현상변경허가 조건으로 관계전문가가 참여하는 기술지도단을 구성해 시행할 것을 주문했다. 

남수문 복원공사는 착공한지 1년 9개월이 걸려 2012년 6월 5일 완공됐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7차에 걸친 기술지도단의 자문을 받아 공사가 진행됐다. 남수문 복원 준공행사는 2009년 7월 1일부터 시작된 수원천 복원공사가 2012년 3월 16일 완공됨에 따라 함께 진행됐다. 

남수문 복원 준공행사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남수문 복원 준공행사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 행사는 남수문과 수원천 복원사업의 완공을 축하하는 한마당 축제로 2012년 6월 9일 남수문 일원에서 열렸다. 이로써 1991년부터 진행된 수원천 1단계 복개사업과 2단계 복개사업의 중단을 거쳐 수원천의 완전한 복원과 남수문 복원이라는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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