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박물관 조감도. (자료=화성박물관)
화성박물관 조감도. (자료=화성박물관)

심재덕 시장이 수원문화원장 재임 시 펼친 화성행궁복원 운동은 수원이 문화도시가 되는데 초석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은 수원의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심 시장은 민선2기 때인 2001년 비서의 비리사건과 정치적 모함으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했다. 2002년 민선3기 시장 선거에 도전했으나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경쟁자인 김용서 수원시의회 의장에게 패하고 말았다. 

김용서 의장은 선거공약으로 향토박물관 건립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시장 취임 후 박물관 건립팀을 구성했다. 박물관 건립사업은 문화관광과 문화재계에서 담당했다. 박물관 건립은 수원시 1호 학예사인 이달호 박사가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한동민 박사(중앙대 강사), 이민식 박사가 전문위원으로 선발돼 박물관 건립 준비 작업을 추진했다.

2003년 ‘수원 성곽 테마박물관 건립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연구’를 시작으로 ‘수원 사운역사박물관 타당성 검토 및 기본계획 연구’와 ‘수원 서예박물관 타당성 검토 및 기본계획 연구’가 동시에 발주돼 진행됐다.

근당 양택동 선생(왼쪽에서 두번째) 서예역사 자료 기증식.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근당 양택동 선생(왼쪽에서 두번째) 서예역사 자료 기증식.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성곽 테마박물관 건립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연구 용역에서는 화성테마박물관 건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박물관 건립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국고보조 신청을 했는데 박물관 위치는 연무대 일원이었다. 기본계획용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반대 여론이 일자 6개 후보지를 추가로 선정해 7개 부지를 세부적으로 검토했다. 

기본계획에서는 최종 3곳을 후보지로 추천했다. 첫번째는 공방거리로 계획된 매향동 현재 수원화성박물관 부지였다. 두번째는 산업도로와 용지가 있는 연무동을 추천했다. 세번째는 이의동 현재 수원박물관 부지를 추천했다. 

이즈음 2004년 서지학자인 사운 이종학 선생의 자료 2만여 점이 기증돼 수원시 선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보다 먼저 서예가 근당 양택동 선생의 서예관련 유물 914점이 기증되면서 박물관 건립은 탄력을 받았다. 

근당 양택동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수원시가 한국서예박물관을 만들겠다고 해 기증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여건이 되자 성곽 테마박물관을 만들자고 했던 것을 재검토 하게 된다. 한 개의 박물관에 수원역사, 화성, 서예, 기증유물, 전자박물관 등을 수용하는 박물관을 만들기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화성테마박물관과 수원역사와 서예를 전문으로 하는 2개 박물관을 만들기로 방침이 정해졌다. 당시 문화관광과 문화재계에는 건축직 1명, 학예사 1명, 전문위원 2명이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박물관 2개를 문화재계에서 담당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수원박물관과 한국서예박물관은 문화관광과에서 이의동 부지에, 화성박물관은 화성사업소에서 추진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당시 화성사업소에는 토목·건축·전기·기계직이 15여명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예사로 김준혁 박사(현 한신대 교수)가 근무하고 있어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화성박물관이 화성사업소로 이관돼 필자와 인연을 맺게 됐다. 화성박물관 추진은 2004년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화성사업소에서 첫 번째로 한 일은 2004년 2월 5일 화성박물관을 매향동 49번지 일원 5000평의 부지로 확정해 추진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다음으로 박물관 추진을 위한 행정절차에 들어갔다. 사업추진에 필수 사항인 도시계획시설(박물관)이 2004년 5월 30일 확정됐다. 이어 실시계획 승인을 거쳐 토지 및 지장물 보상에 착수했다. 2004년 8월에는 화성박물관 건립기본계획인 전시운영 계획 용역을 착수했다.

번암 채재공 선생 유물기증식. (사진=화성박물관)
번암 채재공 선생 유물기증식. (사진=화성박물관)

이즈음 김준혁 박사로부터 희소식을 듣게 됐다. 화성건설의 책임을 맡았던 번암 채재공의 후손이 유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유물처리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국대 김문식 교수와 친분이 있어서 김 교수에게 “수원에 화성테마 박물관을 짓고 있으니 수원시에 기증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 김준혁 박사가 서울에 번암 채재공 후손 집을 가자고 했다. 그래서 서울 강남에 있는 번암 후손인 채호석 김양식 부부를 만나러 갔다. 집에 도착하자 유물을 하나하나 보여 주었다. 참으로 수원이 귀중한 유물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압권은 번암의 영정이었다. 영정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정을 그리는 과정의 초본3점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번암 채재공 초상화. (자료=화성박물관)
번암 채재공 초상화. (자료=화성박물관)

조선시대 왕은 물론이고 공신 반열에 있는 분은 영정을 많이 그렸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번암의 영정은 기초 작업을 했던 초안까지 있는 대단한 유물인 것이다. (후일 번암 채재공의 영정은 보물1477-1호로 지정됐다) 화성 건설을 직접 담당했던 장본인의 유물을 화성박물관이 소장한다는 것은 화성박물관의 격을 높여주는 것이다. 

이후 유물 기증식을 거쳐 유물을 특별전시한다는 조건으로 유물 153점을 기증받아 전시운영계획에 반영했다. 이후 시공업체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선정방식은 설계 시공일괄 입찰 방식으로 발주됐다. 시공사는 KCC건설과 정림건축이 컨소시엄에서 제안한 설계안으로 확정됐다. 

화성박물관 부지전경 사진. (사진=화성박물관)
화성박물관 부지전경 사진. (사진=화성박물관)

보상이 완료단계에 이르자 박물관 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착수했다. 발굴조사 결과 민가에서 사용된 백자제기 등 일부 용품만 출토됐다. 이어 박물관 건축 실시설계와 문화재현상변경허가 등을 이행했다. 

공사 착공은 2006년 9월 13일 화성박물관 현장에서 실시됐다. 공사가 시작되자 여유가 생기게 됐다. 필자는 화성 건설당시 화성전도를 보면서 '동지'가 화성박물관 옆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화성박물관 구상도. (자료=화성박물관)
화성박물관 구상도. (자료=화성박물관)

‘화성성역의궤’ 기록에 의하면 "동지는 2개다. 하나는 매향동 어귀에 있는데 남북길이 58보, 동서 너비 50보, 깊이 7척이다. 기하(마름과 연꽃)를 심었고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다. 이것이 상지이다. 다른 하나는 구천의 북방에 있는데 못은 사방 37보, 깊이 4척으로 이것이 하지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화성박물관 평면도. (자료=화성박물관)
화성박물관 평면도. (자료=화성박물관)

화성성역의궤 내용을 살펴보면 '동지'가 화성박물관 건립지 오른편 삼각형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직원들과 의논을 하자 그곳이 '동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 나는 이참에 화성박물관 옆에 동지를 복원하면 역사적 의미도 있고 박물관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러한 내용을 시장에게 보고하니 그렇게 해보라는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즉시 실행에 옮겼다. 우선 도시계획으로 7140㎡(2160평)을 박물관으로 변경결정(확장)을 추진했다. 그리고 감정평가에 들어가서 보상이 완료되자 2008년 8월 박물관부지 2차 발굴에 착수했다. 발굴결과 동지 유구는 나오지 않았다. 식수로 사용한 우물이 한곳 나왔을 뿐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추가 부지를 박물관 구역에 편입해서 설계변경을 거쳐 그곳에는 주차장과 소공원을 조성하게 됐다. 후일 이곳에는 팔달구청이 자리잡게 된다. 화성박물관은 착공한지 2년9개월 만에 준공됐다. 이즈음 수원박물관이 먼저 개관이 되자 박물관사업소가 만들어져 산하에 수원박물관(수원역사 및 한국서예박물관)과 수원화성박물관을 두는 체제가 됐다.

화성박물관 개관식. (사진=화성박물관)
화성박물관 개관식. (사진=화성박물관)

화성박물관 개관식은 2009년 4월 27일에 열렸다. 이후 2014년 3월 27일 광교 택지개발사업지구에 경기도시공사가 건립한 광교박물관이 수원시에 기부 채납돼 수원은 박물관 3개를 보유한 도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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