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전도, 모든 길은 한양을 중심으로 연결됐었다. (자료=대동여지 전도에 10대로 표기)
대동여지전도, 모든 길은 한양을 중심으로 연결됐었다. (자료=대동여지 전도에 10대로 표기)

고사성어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는 바닥에 네모난 돌을 반듯하게 깔아 길을 냈다. 로마는 세월이 흘러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하게 됐는데 통일된 곳에는 어김없이 로마의 길이 만들어졌다. 

이 길은 그리스, 프랑스, 독일, 북유럽과 스페인까지 뻗어 나갔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생겼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나라에서든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활동하던 삼국시대 세 나라는 오늘날의 서울에서 각축을 벌였다. 그리하여 서울 인근에는 많은 도로망이 형성돼 다양한 문화의 전파로가 될 수 있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조조(肇造)구역지도, (동여비고 1685년). (자료=양산 대성암소장)
신라, 백제, 고구려 조조(肇造)구역지도, (동여비고 1685년). (자료=양산 대성암소장)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한반도의 중앙을 행정구역으로만 편입시켰을 뿐, 정치·경제·문화의 거점은 여전히 경주에 두었다. 고대 국가의 수도는 간선가로망의 중심부에 위치해 국내외의 모든 정보를 총괄할 수 있어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했다. 결국 변경에서 벌어진 각종 민란에 대응이 늦어지면서 후삼국시대로 돌입하고 말았다.

후삼국을 거쳐 고려가 개국하게 된다. 고려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서경으로, 백제의 수도였던 오늘의 서울을 남경으로, 신라의 수도를 동경으로 삼고, 한반도의 중앙에 있는 개경을 수도로 삼았다. 이렇게 되자 고려의 도로망은 개경을 중심으로 형성되게 된다.   

고려 개국 474년 만에 국운이 쇠하자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개경에서 개국했다. 태조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 도읍의 건설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는 구 왕조와 보이지 않는 끈을 끊어 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태조 2년(1393) 이미 진행 중인 계룡산 신 도읍 현장을 답사했다. 

도성도(동여비고 1685년 제작) 모악, 인황산, 백악(북악)이 표기돼 있다. (자료=양산대성암소장)
도성도(동여비고 1685년 제작) 모악, 인황산, 백악(북악)이 표기돼 있다. (자료=양산대성암소장)

이는 하륜의 모악주산론(母岳主山論)이 나옴에 따른 행차였으나 계룡산이 왕도로 만족치 못하게 생각하고 발길을 되돌렸다. 귀경길에 고려 남경(南京)의 옛 궁터를 살펴보고는 정도전의 백악주산론(白岳主山論)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였다. 태조3년(1394) 10월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이후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는 정종에게 양위를 하게 된다. 정종은 즉위 후 개경으로 돌아갈 뜻을 밝힌다. 이윽고 정종1년(1399) 개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2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태종에게 양위한다. 3대 임금으로 즉위한 태종은 창덕궁을 건립하여 태종5년(1405)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게 된다. 한양은 정종의 개경 환도로 인하여 6년 동안 관리되지 않아 많은 부분이 퇴락하게 된다. 

태종7년(1407년) 4월 20일자 태종실록기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  
태종7년(1407년) 4월 20일자 태종실록기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  

그러자 태종7년(1407년) 4월 20일 한성부(漢城府)에서 도성(都城)에 대한 정비계획을 올린 기사가 태종실록에 실려 있다. “도성 5부의 방(坊)이름, 교량이름, 가로 이름 등의 표시가 모두 퇴락하였으니 다시 써 붙이겠다고 건의한다. 도로는 곧아서 차량(車兩)의 출입(出入)을 편리하게 하였었는데, 지금 무식(無識)한 사람들이 자기의 주거(住居)를 넓히려고 하여 길을 침로해 울타리를 만들어서 길이 좁고 구불구불 해졌으며, 혹은 툭 튀어나오게 집을 짓고, 심한 자는 길을 막아서 다니기에 불편하고, 화기(火氣)가 두렵사오니, 비옵건대, 도로(道路)를 다시 살펴보아서 전과 같이 닦아 넓히소서. 이미 토지(土地)를 받아 집을 짓고 사는 자가 또 친족(親族)의 이름으로 속여서 다시 터를 받아, 채소와 삼[麻]을 심는 자가 있사오니, 비옵건대, 조사하여 다른 사람이 진고(陳告)하는 것을 허락하여 집을 짓게 하소서. 신도(新都)의 가사(家舍)가 모두 띠[茅]로 덮었고, 민가(民家)가 조밀하여 화재가 두려우니, 비옵건대, 각방(各坊)에 한 관령(管領)마다 물독[水甕] 두 곳을 설치하여 화재에 대비하소서. 길옆의 각 호(各戶)는 모두 나무를 심게 하고, 냇가의 각 호는 각각 두 양안(兩岸)에 제방(堤防)을 쌓고 나무를 심게 하소서.” 라고 보고한다.

또한 태종15년(1415년 8월) 한성부에서 도로 제도 정비의 필요성을 건의한다.
"나라 안의 도로가 예전에는 9궤(軌)·7궤의 설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한 제도가 없어 길옆에 사는 백성들이 침삭(侵削)함이 없지 않으니, 빌건대, 예조로 하여금 옛것을 상고하고 마땅한 것을 참작하여 넓고 좁은 것을 정하고, 또 개천 양쪽 언덕이 날로 줄어드니 아울러 제도를 정하게 하고, 또 성 아래 안팎의 길을 열고 성을 맡은 관리로 하여금 성곽의 무너진 곳을 순찰하여 그때 즉시 이지러진 곳을 보수하게 하소서" 라고 건의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도로를 침탈하는 일이 심화되자 세종8년(1426)에도 한성부에서 도로 정비를 다시 건의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세종이 이르기를 "이 일은 큰 일 이므로 인가를 부숴 철거하고 도로를 고칠 때에, 사정(私情)에 용납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한성부에서 호조·공조의 당상관과 함께 일동이 계량하여 도로를 개통하도록 하라"하였다. 

그러나 한양의 도로 정비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기에 지속적인 추진으로 마침내 대·중·소로로 가로망이 정비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수도 한성의 도로는 대로·중로·소로로 부분하였다. 대로는 56척(尺),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 그리고 길 양쪽에 도랑은 2척으로 정하였다. 

1척을 31.21cm로 계산하면 대로는 17.8m, 중로는 5m, 소로는 3.43m이고 도랑은 62cm정도가 되었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의하면 황제의 도성내 대로는 9궤, 제후의 도성내는 7궤로 정했음을 알 수 있다. 

도성도(동여도) 1860년대 김정호 제작.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성도(동여도) 1860년대 김정호 제작.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로의 형태를 살펴보면, 주요간선도로는 이미 개국 초기에 정해졌다. 동서 주요 간선도로는 홍인문(동대문)에서 시작되어 종묘 앞과 종루를 지나 경희궁 앞에서 약간 굽어져 돈의문(서대문)에 이르러 한성을 남북으로 구분되었다. 

남북 간선도로는 숭례문(남대문)에서 시작되어 곡선을 이루며 종루에 연결되어 T자형의 3교차를 형성하고, 북쪽은 경복궁 앞에서 광화문 네거리까지와 창덕궁 앞에서 종로3가 네거리까지 2개의 간선로가 3교차로를 형성하여 동서간의 주축도로(종로)에 연결되었다. 

또한 주요도로의 끝에는 경복궁·창덕궁·경희궁·남대문·동대문 등의 웅장한 건물들이 노단(路端)을 이루었고, 주요간선도로의 좌우에는 연달아서 계속된 행랑건축(行廊建築)이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일반주택가는 도로형태가 불규칙하여 매우 무질서한 상태에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조선의 도로망이 전국적으로 파악되기 시작한 것은 1770년(영조46)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이 편찬한 ‘도로고(道路考)’이다. 신경준은 조선의 도로망을 6개의 간선가로망으로 분류하여 6대로 체계를 정립했다. 

조선6대로 대동여지전도에 표기. (자료=김충영 필자)
조선6대로 대동여지전도에 표기. (자료=김충영 필자)

제1대로는 조선이 중국대륙과 교류를 위해 가장 중시했던 도로로 서울~의주로로 불린다. 주요 경유지는 홍제원에서 출발하여 파주, 개성, 서흥, 평양, 청천강을 거쳐 의주에 이르렀다.

제2대로는 여진족 등 북방 경비의 필요성에 의해 발달된 서울~경흥로 이다. 수유리, 금화, 신안, 원산, 함흥, 명천, 경성, 회령을 거쳐 경흥 및 서수라 까지 이어진 길이다.

제3대로는 서울에서 망우리 쪽으로 향하여 평구, 양근, 원주와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삼척, 울진, 평해에 이르는 서울~평해로 이다.

제4대로는 일본사행로(日本使行路)인 서울~동래로 이다. 한강을 건너 진천, 충주를 거쳐 문경세재를 넘어 대구, 양산, 동래에 이르는 길이다. 

제5대로는 서울에서 노량진, 남태령, 인덕원, 수원을 거쳐 충청, 전라도 해남을 거쳐 제주도에 이르는 서울~제주로 이다.

제6대로는 서울에서 김포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노선으로 서울~강화로 이다. 강화유수부와 연결된 길이다. 

경기전도, 한양에서 전국으로 연결된 6대로가 경기도를 경유하는 노선. (자료=고려대학교 박물관소장)
경기전도, 한양에서 전국으로 연결된 6대로가 경기도를 경유하는 노선. (자료=고려대학교 박물관소장)

6대로는 서울을 기점으로 방사선으로 각 지역으로 연결되었다. 이렇게 나누게 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제1대로인 의주로에는 개성유수부와 평양감영을 통과했다. 제2대로인 경흥로에는 함경감영을 통과했다. 제3대로인 평해로에는 강원감영을 통과했다. 

그리고 제4대로인 동래로에는 경상감영을 통과했다. 제5대로인 제주로에는 충청과 전라감영을 통과했다. 제6대로는 강화유수부를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이는 지방행정기관과 서울을 잇는 중요 노선으로 조선의 길은 한양으로 통했다. 오늘날 국도와 고속도로 기능을 담당했던 노선이었다.

이렇게 유지되던 조선의 간선가로망은 사도세자 묘의 수원 화산 이장으로 인한 화성건설과 이은 을묘년의 혜경궁홍씨 회갑연의 개최 등으로 원행길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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