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산업도로 장안구청사거리 부분사진. 안양에서 수원까지 건설된 장안구청사거리의 경수산업도로의 모습이다. 직각으로 꺽여서 장안문으로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산업도로 1공구의 모습이 보인다.  만석거와 공사중인 한일합섬이 보인다. 1972년 완공된 공설운동장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써비스)
경수산업도로 장안구청사거리 부분 사진. 안양에서 수원까지 건설된 장안구청사거리의 경수산업도로의 모습이다. 직각으로 꺾여서 장안문으로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산업도로 1공구의 모습, 만석거와 공사중인 한일합섬, 1972년 완공된 공설운동장 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써비스)

수원은 역사 이래로 한반도 서쪽에 위치한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통과하는 곳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으로 연결됐고 조선시대에도 한양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통과했다. 1770년 신경준은 조선의 간선도로망을 6대로 체계로 정립해 수원을 통해서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제주로’라고 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군현제’ 첫머리에 읍지를 설치하려면 “산천의 형세, 전야(田野)와 인민, 관방과 성지, 도로의 요해 등을 일일이 참작해서 마땅히 정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구 수원읍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난 곳에 있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넓은 평야지인 팔달산 자락에 신읍터를 정했다.

화성축성을 추진하면서 정조는 1795년 윤2월 어머니 혜경궁홍씨 회갑연을 수원에서 열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화성으로 가는 1700여명의 행렬은 과천의 남태령을 넘어야 했다. 정조는 남태령 산길이 험해 이를 정비해야 하는 과천 주민들의 고생이 많음을 알고 상대적으로 평탄지인 ‘시흥길’ 건설을 지시하게 된다. 

시흥길이 건설되면서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제주로는 새로운 길로 바뀌게 된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에도 간선도로 역할을 하게 된다. 일제통감부는 1906년 ‘7개년 도로개수계획’을 세워 추진했다. 1908년 수원에서 이천까지 도로가 건설됐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도로규칙’을 공포하고 ‘제1기 치도공사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가 다시 2년을 연장, 1917년까지 시행했다. 이때 수원에서 연기군 소정리까지 제주로가 1등도로(7.3m)로 정비됐다. 이 때 서울에서 수원까지 도로를 개수한 기록이 없으나 이는 정조시대 시흥로가 대로로 만들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조선총독부 도로규칙이 1938년 12월 1일 ‘조선도로령’으로 바뀌면서 제주로는 국도 1호선이 됐다. 1962년 1월 1일 조선도로령이 폐지되고 도로법이 새로이 제정돼 새로운 도로체계가 마련됐다. 새로운 도로법에서도 목포에서 수원을 거쳐 서울까지 연결되는 노선은 국도1호선으로 유지됐다. 

이후 한국은 현대 격변기를 격어야 했다. 1945년 해방과 1950년의 한국전쟁, 1961년 발생한 5.16 이후 경제발전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다. 박정희 정부는 1962월13일 경공업을 중심으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이어 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서는 중공업을 활성화하는 정책이 추진됐다.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과 안양, 수원에 공단 조성이 추진되자 원활한 물동량의 수송이 필요하게 됐다. 1968년 2월에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착수하게 된다. 경인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21일, 경부고속도로 서울~오산 구간은 1968년 12월 30일 개통했다.

한편 서울 광화문에 있던 경기도청이 1967년 6월 23일 수원으로 이전함에 따라 수원은 경기도의 행정중심이 됐다. 아울러 삼성전자, 한일합섬, 대한방직, 선경합섬과 연초제조창 등이 들어섬에 따라 서울~수원간의 교통량이 증가하고 경수산업도로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수원은 1965년 경기도의 수부도시 기능을 수용하기 위한 도시계획을 수립한다. 이 때 제시된 도로망계획은 장안문~팔달문~중동4거리~수원역~서문삼거리~장안문에 이르는 제1내부순환도로가 계획됐다. 그리고 성곽 밖으로 제2순환도로가 계획됐다. 도시외곽으로 제3순환도로가 제안됐다.

1967년 수원시 장기발전구상도. 1965년에 구상한 계획이 법적인 계획으로 반영된 도시계획도이다. 오른편에 경부고속도로와 신갈 일원이 수원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됐다. 신갈지구가 편입된 것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인터체인지 주변의 개발과 민속촌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된다. (자료=수원시)
1967년 수원시 장기발전구상도. 1965년에 구상한 계획이 법적인 계획으로 반영된 도시계획도이다. 오른편에 경부고속도로와 신갈 일원이 수원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됐다. 신갈지구가 편입된 것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인터체인지 주변의 개발과 민속촌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된다. (자료=수원시)

이 때 수립된 도시계획은 1967년 도시계획 재정비에서 수정돼 도시계획이 확정됐다. 제1순환도로는 1965년의 계획이 반영됐다. 그리고 성곽 밖으로 계획된 제2순환도로와 제3순환도로가 재조정돼 도심 우회도로가 계획에 반영됐다. 이렇게 하여 지지대고개~장안구청사거리~창룡문사거리~동수원사거리~ 비행장사거리~ 병점에 이르는 경수산업도로계획이 확정됐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서울 영등포~안양구간 국도1호선인 시흥로 확장공사를 1963년 착공해서 1968년 마쳤다. 뒤이어 안양에서 수원구간인 현재 종합운동장이 위치한 장안구청사거리 구간을 1973년 착공해서 1976년 완공했다. 경수산업도로가 장안구청 사거리까지 연결되자 당시 수원의 교통여건은 크게 향상됐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였다.

경수산업도로가 장안구청 사거리에서 멈추자 장안문에서 팔달문에 이르는 도심구간은 교통체증이 심화됐다. 1962년 수원시 인구는 11만3910명이었다. 경수산업도로가 개통되던 1974년 21만258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1980년에는 31만9968명으로 급격하게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수원시는 장안구청 사거리에서 수원비행장까지 산업도로 건설계획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수원시의 예산규모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서 수원시는 산업도로가 지나가는 곳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행해 시비투자를 줄이고자 했다. 그렇게 하면 토지와 공사비를 토지구획정리 사업에 부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9년 수원시정연구원이 발간한 ‘70년 수원시 도시공간의 역사­데이터북’에 아래 표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지지대고개에서 비행장사거리에 이르는 경수산업도로 건설 전·후사진. 왼쪽사진은 경수산업도로가 장안구청까지 건설된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경수산업도로가 비행장사거리까지 건설된 모습이 보인다. 산업도로 주변으로 북쪽으로부터 파송2, 파송1, 지만인계,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지지대고개에서 비행장사거리에 이르는 경수산업도로 건설 전·후사진. 왼쪽사진은 경수산업도로가 장안구청까지 건설된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경수산업도로가 비행장사거리까지 건설된 모습이 보인다. 산업도로 주변으로 북쪽으로부터 파송2, 파송1, 지만인계,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경수산업도로 1공구는 장안구청 사거리에서 창룡문사거리까지 1.9km 구간을 35m폭으로 1979년에 시행해 1980년에 완공했다. 이 구간에는 파송 1,2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병행 시행됐다. 경수산업도로 2공구는 창룡문사거리에서 동수원사거리까지 1.3km구간을 35m폭으로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지만인계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가 지정돼 병행 추진됐다. 

경수산업도로3공구 준공식 모습. 경수산업도로 전구간 개통 준공식이 1982년 6월 동수원사거리에서 개최됐다. 경수산업도로 11.5km 전 구간이 이날 개통됐다. (사진=수원시)
경수산업도로3공구 준공식 모습. 경수산업도로 전구간 개통 준공식이 1982년 6월 동수원사거리에서 개최됐다. 경수산업도로 11.5km 전 구간이 이날 개통됐다. (사진=수원시)

경수산업도로 3공구는 동수원사거리에서 세류동 비행장사거리까지 4.3km 구간을 폭 35m를 추진해야했다. 1980년대는 경기침체로 토지매각이 어려워지자 경수산업도로 건설에 필요한 재원조달을 위해서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한국토지공사에 위탁하게 된다. 그리하여 택지조성 이전에 경수산업도로 3공구를 1982년 6월에 개통하게 됐다. 경수산업도로 도시계획이 수립된 지 15년만의 개통이었다. 

당시 권선지구 단지계획을 추진하면서 미래 교통량 증가를 대비해 동수원사거리에서 비행장사거리 구간 4.3km 구간을 35m도로 양측에 완충녹지 10m를 지정, 55m의 도로폭을 확보했다. 이후 서울시와 안양시, 의왕시는 경수산업도로 폭을 35m에서 50m로 확장을 추진했다. 

수원시도 이에 발맞춰 35m폭을 50m폭으로 확장계획을 추진했다. 이미 동수원사거리에서 비행장사거리 구간은 55m를 확보했기에 지지대고개에서 동수원사거리 구간을 확장하면 됐다. 당시 1980년대 중반은 대부분 미개발지였기에 도로를 확장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던 시절이었다. 

1986년 도시계획재정비때 경수산업도로 확장계획을 수립하여 경기도를 경유, 건설부에 신청을 하였다. 그런데 건설부로부터 경수산업도로 확장근거를 제출하라는 공문이 시달됐다. 그리하여 수원시는 경수산업도로의 확장필요성을 작성해 제출하자 확장의 필요성이 미비하다는 것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 당시 남우철 도시과장이 건설부 도시계획과를 찾아가 경수산업도로 확장 반대 이유를 묻자 담당자는 1979년 12.12사태의 주역 중 한 사람(토지대장에 본인 명의 확인)이 동수원사거리에 진선미예식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 건물이 50m확장에 편입되자 반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건설부는 경수산업도로 지지대고개에서 동수원사거리 구간 확장계획을 수용하지 않았다. 

파장동 대지조성사업 전후 사진. 왼쪽사진은 대지조성이 완료된 모습이다. 산업도로 변에 확보됐던 15m폭의 확장구간을 지우고 뒷땅에 합필해 넓게 조성한 모습이 보인다. 오른편은 현재의 모습이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파장동 대지조성사업 전후 사진. 왼쪽사진은 대지조성이 완료된 모습이다. 산업도로 변에 확보됐던 15m폭의 확장구간을 지우고 뒷땅에 합필해 넓게 조성한 모습이 보인다. 오른편은 현재의 모습이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그 무렵 한일합섬에서 북쪽으로 500여m 지점 오른쪽에 미개발지 1만여 평의 전답이 있었다. 그곳을 한국토지공사가 대지조성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수원시는 현재 경수산업도로 확장계획이 있으니 확장부분을 후퇴해서 개발하고 사업이 완공되면 15m구간을 수원시에 기부채납하는 조건을 제시하자 토지공사가 조건을 수용하겠다고 하여 사업이 추진됐다.

이런 가운데 경수산업도로 확장이 무산되자 토지공사가 파장동 대지조성공사 구간만 확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냐고 이의를 제기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2002년 민선3기 지자체장 선거에서 김용서 시장이 당선되자 김 시장은 수원시 교통난 해소 대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때 가장 먼저 추진한 사업이 동수원사거리 입체화 계획이었다.

동수원사거리 고가도로 건설 전후 사진. 왼쪽사진은 고가도로가 건설되기 전 모습이다. 오른편은 고가도로가 건설된 모습이다. 고가도로 옆의 건물들이 없어지거나 폭이 좁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상단부에 보이는 건물이 경기도 노동복지회관이다. 현재는 권선구청 옆에 새로이 건립했다. (자료=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동수원사거리 고가도로 건설 전후 사진. 왼쪽사진은 고가도로가 건설되기 전 모습이다. 오른편은 고가도로가 건설된 모습이다. 고가도로 옆의 건물들이 없어지거나 폭이 좁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상단부에 보이는 건물이 경기도 노동복지회관이다. 현재는 권선구청 옆에 새로이 건립했다. (자료=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동수원사거리에 고가도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측에 추가로 확장이 돼야 했다. 그리하여 당시 동쪽에 있던 경기도 노동복지회관과 5개의 건물을 보상을 해야 했다. 

필자는 요즈음 아침 저녁으로 경수산업도로를 지나다니고 있다. 한 사람의 재산 지키기로 인한 수원시민들의 피해는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실감한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