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칼국수 모습. (사진=김우영 필자)
종로칼국수 모습. (사진=김우영 필자)

45년 된 수원의 대표적 음식점 ‘종로칼국수’가 문을 닫았다.

며칠 전 통닭거리를 지나쳐 북쪽 골목길로 올라오던 길에 종로칼국수 출입문에 ‘상중(喪中)’이라고 쓴 종이를 보았다. 누구지? 누가 돌아가신 건가.

오늘은 그 집에서 식탁 등 살림살이들이 나와 트럭에 실리는 것을 보았다. 아! 이 집이 문을 닫는구나. 며느리로 보이는 이에게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무려 45년 된 집이다.

바깥사장님이 돌아가셨고 안사장님도 이제 연세가 80이 넘어 혼자서 꾸려가기 어렵다고 했다.

예상은 했었다. 그 건물이 매우 오래된 터, 전체를 리모델링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겠구나 생각했다.

옛 신풍초등학교 옆에서 이전해온 대폿집 딱 한잔집도 이곳에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큰형님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신풍동이 젊은이들의 명소가 되면서 이사를 해야 했다. 현재 건물은 내가 귀띔을 해줘서 옮겨왔다. 그런데 2년이나 됐나 또 이전을 해야 한단다.

수원천 건너편 수원시 윗쪽에서 코다리냉면집을 하다가 집이 헐리고 공원이 되는 바람에 음식장사를 접고 이 건물의 7080라이브주점을 인수한 부부도 요즘 표정이 심란해 보인다. 가게를 인수하자마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년 넘게 휴업을 했는데 이제 좀 풀리는듯하니까 가게를 비워줘야 하는 것이다.

올해 개업한 그 옆의 홍어집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코로나 시국에서 개업한지 몇 달 되지도 않았건만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란 안내문이 내걸린 것을 보니 딱하기 이를 데 없다.

2층에는 노년층이 주로 이용했던 콜라텍 무도장이 있었는데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아예 문을 닫고 말았다.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론 이웃 건물에서 쫓겨난 비둘기 가족이 들락거리고 있다. 조금 후면 이놈들도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야 할 거다.

오래 산 것은 아니다.(큰 형님들과 비교하면) 그런데 최근 많은 단골집들이 사라졌다. 지동시장 뒤 지동마을 입구에 있던 안성집이 제일 아쉽다. 40년 넘게 순댓국 4000원을 고집하던 주인내외의 푸근한 미소가 생각날 때마다 방앗간 참새처럼 드나들었다. “나이를 세다가 잠이 들어서 나이를 잊어먹었다”는 내외를 얼마 전 수원천 산책길에서 만났는데 가끔씩 내 얘기를 하신단다. 곧 전화를 드리고 저녁 식사라도 한번 해야겠다.

통닭거리 위쪽에 중국집이 있었다. 음식값도 저렴한데다 내가 좋아하는 생맥주도 싸게 팔아서 벗들과 자주 이용했다. 칸막이된 안쪽에 대여섯명이 들어가 요리 서너 가지에 마시는 맥주맛이 좋았다. 그런데 코로나가 오면서 적자가 늘어나 장사를 접었다.

그 자리엔 닭곰탕집이 들어왔다. 이 친구의 닭곰탕을 참 좋아했다. 속이 허한 날은 반드시 들렀고 내 가족과 이웃들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인은 나와 나이가 비슷해서 친구삼기로 했다.

그러나 그도 코로나19의 혹독한 시련을 넘지 못했다. 텅 빈 가게에서 홀로 시름을 이어가던 어느 날 아침 차갑게 식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종로칼국수마저 사라짐으로써 또 하나의 단골집이 사라졌다.

이 집의 담백하지만 은근한 감칠맛이 났던 칼국수도 일품이지만 내가 특히 좋아한 음식은 콩국수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종로칼국수집 콩국수를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돌아가신 바깥양반이 아침마다 갈아 만든 콩국물은 콩의 향이 살아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콩국수 중에 단연코 으뜸이었다. 우리나라 최고라는 얘기다.

얼마 전 돌아가신 바깥양반은 책을 참 좋아하시는 선비였다. (사진=김우영 필자)
종로칼국수집 식당 한편에 있는 서재. 얼마 전 돌아가신 바깥양반은 책을 참 좋아하시는 선비였다. (사진=김우영 필자)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식당 삼면 천장에까지 닿도록 가득 꽂혀있는 책을 구경하는 재미도 심심치 않았다. 처음 온 사람은 서점인줄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바깥양반은 독서광이었다. 아쉬움 속에서 명복을 빈다.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파라프라바릇타야 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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