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호 시인.
임병호 시인.

얼마 전 ‘병호 형님’의 전화를 받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부터 막걸리 값이라도 나오는 데가 있느냐는 등 형님답지 않게 시시콜콜한 일까지 장시간 통화했다.

중간에 말을 끊고 “그러는 형님은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묻자 병원에 계시단다. 지난해 가을에 뇌경색에 얼마 전 대상포진, 이번엔 심장 수술이다.

또 병원이다. 아주대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란다. 허벅지 쪽 혈관을 떼어서 심장으로 이식하는 수술인데 십 수 년 전 우리 어머니도 똑같은 수술을 받았다.

병호형님은 임병호 시인이다.

내 의형(義兄)이다. 나하고는 10살 차이가 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의 진득한 인연으로 의형제를 맺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오로지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하나로 문학서적만 탐독했던 고교시절, 운명처럼 만났다.

옛 보건소 옆 지금은 사라진 수원문화원에서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석수 시인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그가 병호 형님을 소개해줬다. 처음엔 선생님으로 불렀다가 술자리가 거듭되면서 자연스럽게 형님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 후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 술을 마시면서 시를 얘기했고 인생을 논했다.

그는 1965년 18세 나이로 전국 규모 동인지인 ‘화홍시단’을 창간했고 안익승·김석희 선생 등과 3인이 수원문인협회를 창립한 ‘살아있는 수원문학사’이면서 ‘인간 수원문학관’이다.

1986년판 ‘수원시사(水原市史)’는 ‘시·시조’ 문학편에서 임병호 시인을 이렇게 소개했다.(참고로 당시 문학 편을 포함한 문화예술 분야는 내가 집필을 맡았다.)

‘그는 1947년 수원에서 출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원을 떠나지 않으면서 묵묵히 시작과 후진양성을 해온 인물로서 10대 후반이었던 1965년 수원지역 최초의 전국 규모 문학동인지 ‘화홍시단’을 창간했다. ‘화홍시단’은 수원에서 창간됐지만 김석규 김용길 엄창섭 최호림 등 전국에서 많은 문인들이 참여한 전국 문예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화홍시단’을 창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광주의 ‘시향’과 안양의 ‘시와 시론’ 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쳐 1975년 첫 시집 ‘환생’을 발간한 데 이어 ‘가을엽서’ ‘神의 거주지’ ‘우만동별곡’ ‘아버지의 마을’ 등의 시집과 동시집 ‘새들이 방울을 흔든다’ 등을 계속해서 펴냈다. 수원문인협회 초대 및 2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기시인협회 회장, 경기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체육부장을 맡고 있다...(후략)‘

어느 날 저녁 퇴근 무렵 형님이 일하던 수원시청으로 가니 대뜸 “나가서 한잔하자”고 나선다. 그의 손엔 묵직한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는데 첫 시집 ‘환생’이 들어있었다.

‘여름 눈발이 흩날리는 연무동 길/어미를 부축하고/병원에 가면서/쉰여섯 해의 생애를 가로막으려는/허무의 그림자를 만났다.‘//어찌하여 의사가 되지 않고/어쩌다가 효자도 되지 못하고/詩 한 줄 붙잡고 살아 있는,/누구를 위해 이렇게 되었나.//홍역하고 일어난 자식 놈 위해/개구리 잡아/호박잎에 싸 구워 먹이고/종기의 피고름/입으로 빨아내어 치료해 주시던/불가사의한 사랑/그 겨울의 양지 같은 손길 떠나면/영원한 미아(迷兒).//그러나/아, 그러나/생활의 비탈길에선/어미의 약값처럼/처자(妻子)의 무게도 힘겨웠다.‘- ‘죄인’

이 시와 함께 ‘파리채’란 시도 기억에 남는다, 저승을 눈앞에 둔 어머니 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파리만 잡았다는 내용인데, 어린 나이에도 울컥 눈물이 솟구쳐 술잔만 연속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음날 눈 떠보니 형님과 형수님, 아이들 다섯까지 엉켜서 자는 우만동 셋방이었다.

형님은 일찌감치 혼인을 하여 20대 초반에 가장이 됐다. 아내와 딸이 굶지 않도록 공사판을 전전하면서도 시를 썼다. 그러다가 수원시 공무원이 됐고 이어 지역 유력일간지 기자가 됐다. 문화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을 하다가 정년퇴직해 지금은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장이자 계간 시전문지 ‘한국시학’ 발행인을 맡고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나의 삶도 임병호 형님과 비슷하다. 비교적 일찍 혼인해 아이를 5명이나 낳았다. 다만 병호 형님은 4녀1남인데 나는 3녀2남이다. 혼인 후 쌀을 사기 위해 공사판에 다닌 적도 있다.

한 칼럼에도 이 이야기를 썼다.

‘1980년대 중반 쯤 화서문 밖 연립주택 공사판에 내가 있었다. 벽돌이나 시멘트를 지고 ‘아르방’이란 철판을 오르내렸다. 아르방은 비행장 임시활주에 까는 구멍 뽕뽕 뚫린 철판이다. 시내의 작은 개천을 건너는 다리에 깔아놓아 뽕뽕다리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러 직업을 거쳐 월간 잡지 ‘우리 수원’을 만들기 위해 수원시청에 들어갔고 몇 년 후 수원시청을 그만두고 신문사 창간 작업에 참여해 문화체육부장을 역임했다. 5년 정도 지난 후 당시 심재덕 시장의 권유로 다시 수원시청에 들어가 10일에 한번 발행되는 신문 ‘늘푸른 수원’을 창간했다.(나중에 인터넷 신문 ‘e수원뉴스’로 바뀌었다.) 퇴직한 지금은 사설을 쓰는 중이니 인생 역정이 흡사한 것이다. 게다가 시를 쓰는 문학의 도반이기도 하다.’라고.

그런데 형님의 술사랑은 나보다 더하다. 그리고 드디어 요즘 건강에 적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너도 술 쪼끔씩만 먹어”

이제부터 음주가무는 엄두도 못 낼 일이라며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래요. 형님, 나도 술 줄일 테니 건강 잘 살피세요. 수원문학의 대부가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마음속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뭐하나. 어제는 야구장에서 후배들 만나서 한잔 했다. 조금 전엔 이따 석양주 한잔 마시자는 언론사 선배의 전화가 왔고, 내일은 생일을 맞은 친구 술자리가 예정돼 있다. 모레는 동생들과 만나는 날이다. 월요일엔 한동안 뵐 수 없었던 원로시인을 만난다.

쯧, 이래서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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