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돌아오니 문득 방 한구석에 놓인 커다란 종이상자 두개가 눈에 밟힌다. 아내가 집안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내 원고들이었다. 반갑게도 첫 시집도 열권 정도 들어 있었다.

사십년 넘는 세월이 흘러 부서질 정도로 누렇게 변색된 원고들을 들춰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마냥 그대로 둘 수는 없어 극히 일부만 남기고 재활용 폐기물로 내다 버렸다. 물론 아까웠다. 문학에 전 생애를 걸었던 내 젊은 시절의 흔적이었으니까.

잘했다. 이젠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동안 내 눈과 마음을 가리고 있던 생각과 허울들을 벗어야 한다.

버려야 할 것들을 추려내다가 오려낸 신문 한 조각을 발견했다.

1975년 2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양성우 ‘겨울 공화국’.
1975년 2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양성우 ‘겨울 공화국’.

...(전략)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군홧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지금은 겨울인가/한밤중인가/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중략)...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물려줄 것은 부끄러움뿐/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후략)...

1975년 2월 23일자 동아일보는 광주의 젊은 시인이 학교로부터 사표제출을 종용받고 있다는 기사와 그의 시를 실었다. ‘기도회서 겨울공화국 시 낭송한 詩人敎師(시인교사) 辭表(사표) 강요’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시인은 광주 YWCA가 주최한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위한 구국금식기도회'에서 유신정권의 폭압을 비판한 시를 낭독했는데 ‘기관’의 압력으로 해직을 당할 처지라는 내용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시는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 일부였다.

‘겨울 공화국’ 시 뒷면에는 ‘법조인의 격려’ ‘순망치한(脣亡齒寒)’ ‘긴급조치로 구속됐다가 출감한 민주통일당 장준하(張俊河)’ 등의 작은 개인광고들이 있었다.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 때 의문의 죽음을 맞은 그 장준하 선생이 맞다.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돼 활동한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민주화운동가였던 그 이. 일본군 병영을 탈출한 뒤 독립군에 합류, 조국에 목숨을 내놓았던 그 이. 이후 삶은 험난했다.

반면 독립군 토벌대에 속했던 일본군 장교는 훗날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됐다.

장준하 선생은 동아일보에 이 광고를 낸 몇 달 후인 1975년 8월 17일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는다.

1975년 2월 23일자 동아일보 장준하 선생 백지 광고.
1975년 2월 23일자 동아일보 장준하 선생 백지 광고.

이 당시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막내 삼촌은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당시만 해도 자유언론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러니 군사독재정권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게다.

그 정권은 1974년 말 부터 1975년 초에 걸쳐 동아일보 광고탄압을 했다. 계약된 광고들이 모조리 해약됐다. 광고 면은 백지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였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공권력을 발동해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조직적으로 탄압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중앙정보부가 1974년 동아일보와 계약한 광고주들을 불러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동아일보 독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이 작은 개인광고를 게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막내 삼촌도 ‘힘내라 동아’라는 한줄 광고를 냈다. 나 같은 고교생부터 가정주부 노인들까지 자비광고가 광고 면을 메워나갔다. 유신정권이 당황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뒤에 많은 기자들이 해직됐다. 일부기자들은 정권 편을 드는 경영진을 비난하며 스스로 나가기도 했다. 이들은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고 이들을 주축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됐다.

‘겨울 공화국’ 낭독 이후 학교 측의 강요로 사표를 종용받던 양성우 시인은 결국 1975년 4월 12일 파면됐다.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시 한 편을 읽은 죄였다.

47년 전의 신문 스크랩을 들여다보며 감회에 젖어 있다가 문득 달력을 보니 오늘이 6월 28일, 내일이6월29일이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연세대생 이한열도 최루탄에 사망했다.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민주화운동은 막을 수없는 들불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이 손을 들고 6.29선언을 했다.

그게 벌써 35년 전의 일이고 백발은 내 머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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