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더위를 쫓는 도구하면 부채를 으뜸으로 쳤다.

그래서 선조들은 여름살이 필수 품목으로 여겼다.

뿐만 아니다.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로서의 본래 기능을 유지하면서 다양하게 진화시켰다.

더불어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도구로 생각해 사랑도 깊었다.  의례·장식·차면(遮面)·예술 용도로 사용해서다.

화가(畵家)·서가(書家)·문인(文人)들의 부채 예술품이 대표적이다. 이런 부채는 고려시대부터 국교품(國交品)으로서 한.중.일간 최고의 교역상품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그만큼 예술가치가 뛰어났다는 얘기다.

조선시대엔 신분을 가르고 과시하는 상징적인 도구로도 사용됐다. 양반이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닌 것은 이 때문이었다.

혼례에서 남녀 유별(有別)을 위한 가리개, 또 결의나 서약을 할 때 마음을 묶는 증거물로도 이용됐다.

주로 쥘부채인 접선(摺扇)이 사용됐다. 다수의 부챗살이 한데 결속된다해서 일심동체를 다짐할 때 쓰였다.

부챗살 하나하나에 결의자가 수결(手決)함으로써 변심을 경계했다는 뜻으로 '일심선'이란 이름도 붙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충성이나 효성, 의리의 일편단심을 알리는 수단으로도 썼다. 이런 부채를 '단심선'이라 했는데 주로 표면에 그 뜻을 적었다.

하다보니 부채는 뇌물로도 자주 사용했다. 그리고 사치로도 이어졌다.

조선 성종때 고급 부채 1개 가격이 무명 8~9동에 이르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무명 1동이 50필이므로 400~500필이나 되는 고가다.

축재(蓄財)수단으로 이보다 좋은 것이 없었을듯 싶다.

부채 바람이 재앙을 몰고 오는 악귀와 병마같은 사(邪)도 쫓는다고 믿어 단오 등 여름절기 최고의 선물품목으로도 여겼다.

수령이나 고관들은 이런 부채를 지휘도구로 필수 지참하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을 보면 부채에 담겨있는 의미와 용도가 참으로 다양함을 실감할 수 있다.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공작선(孔雀扇)을 보냈다는 첫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 역사가 천년은 족히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채.

지금은 손 선풍기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세상이다.

물론 바람을 일으키는 기능면에만 그렇다는 얘기지만 말이다.

어제 이러한 손 선풍기가 발암 위험 기준의 최대 322배에 달하는 전자파가 나온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돼 충격을 줬다.

거기에 목 선풍기의 경우 손 선풍기보다 제품에 따라 수십 배에서 수백 배 세기의 전자파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이쯤되면 부채가 진화했다는 손선풍기는 문명의 이기(利器)가 아니라 문명의 흉기(凶器)나 다름 없다.

선풍기·에어컨에 밀려 점점 존재감이 사라지는 부채의 정겨움이 새록 떠오르는 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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