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는 일을 바꾸라고 하면 선뜻 그렇게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순순히 따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고 "어떻게 하라는 거지?" "또 인고의 시간을 겪겠구나" "내가 그 과정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안 하면 안 될까?"…고민에 싸일 것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흔히 경험하는 일이지만 그 혁신을 주도하는 측이 아니라면 두려워하고 귀찮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따르는 건 그 당위성 때문이다. 혁신은 또 다른 혁신을 가져올 가능성을 가진다. 그 변화를 두려워하고 기피하고 싶은데도 혁신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그 변화가 바로 발전임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육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렇게 세상을 바꾸어왔고, 지금 학교에서 ‘교육혁신’의 이름으로 고군분투하는 선생님들 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혁신은 언제나 필요하다. 가령 다 혁신해서 이젠 혁신할 일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교육에는 수준 향상에 한계가 없을 뿐 아니라 정작 혁신해야 할 것을 미루어 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육혁신의 역사는 그 경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업을 중심으로 한 본질적 혁신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로 교육환경, 지원행정 등 가시적·주변적 변화 추구에 주력해왔기 때문에 여전히 ‘주입식 교육’을 탈피하지 못하여 ‘붕어빵 교육’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A. 토플러). 사교육비가 끝없이 늘어나고 이런 교육을 피해 조기유학을 떠나는데도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붕어빵 교육? 세상의 단 한 명도 남과 같지 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같은 시기에(그러니까 하나의 진도표로), 같은 교과서로, 같은 수업과 같은 훈련을 받는 현상을 표현하는 말이다. 기성세대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어서 학생들은 아예 이의를 제기할 마음을 먹지 못할 뿐이지 실제로는 하루하루 그 프로그램에 순응하고 싶지 않은 학생이 많을 것이다.

혁신학교 선생님들은 바로 그 틀을 탈피하고 학생의 개성 존중에 중점을 둔 교육을 하고자 하는 교육혁신 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그 선생님들의 우선적인 고민을 들어보면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좋은 교육을 해주겠다는데도 수혜자(?) 측에서 싫다고 아우성을 치기 때문이다. 좋은 교육을 제공하겠다는데 왜? 그 ‘좋은 교육’에 대해 “좋긴 하지만 대입전형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좋은 교육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입전형에서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높다고) 보는 것이다.

교육혁신을 주장하는 교육자들은 그 사정을 변호하지 못하고 있다.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 좋은 대학에 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장담하거나 설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공적인 학습이 어떤 것이냐?”를 물을 때 “교과서 내용을 정연하게 잘 암기하는 것”이라고 대답해야만 한다면 교육이라는 것이 한심한 수준일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는 그걸 부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에 따라 유익한 프로그램을 애써서 구상하고 그걸 실현하는 일에 매진하면서도 대입전형에 착안하면 결국 석연치 못하다는 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매시간 실험관찰을 진행하고 싶은 과학 교사는 “우리 아이 진학을 방해할 작정이냐?”는 학부모의 항의를 외면하기가 어렵다. 한편으로는 방학 중에도 학생들을 불러 문제 풀이 훈련에 전념하게 하면서 “부지런히 가르쳐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는 것이 죄냐?”고 묻는 교장에게 뭐라고 설득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해결방안은 단순하다. 문제 풀이 훈련에 몰두하는 학교가 올바른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게 확실하다면, 지식이 무엇인지, 교육이 무엇인지, 학교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이어야 하는지 그 논의를 다시 해야 한다. 초등학교쯤은 아직 입시 준비를 할 시기가 아니어서 혁신학교 운영에 안심할 수 있고,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특히 고3이 되면 결국 정상적 교육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교육을 하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답답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