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 「기예질의」 에 적혀있는 ‘담력정쾌(膽力精快)’의 내용이다. 무예를 통해 身몸을 단단하게 만들어 心맘을 풍성하게 채우면 세상살이도 좀 더 편해질 것이다. 내 몸이 허약하면 만사가 귀찮고, 내 몸이 자유로우면 생각도 더 넓어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넘어서 이제는 ‘나는 오직 내 몸으로 생각한다’는 화두를 몸에 새겨보자.
『무예도보통지』 「기예질의」 에 적혀있는 ‘담력정쾌(膽力精快)’의 내용이다. 무예를 통해 身몸을 단단하게 만들어 心맘을 풍성하게 채우면 세상살이도 좀 더 편해질 것이다. 내 몸이 허약하면 만사가 귀찮고, 내 몸이 자유로우면 생각도 더 넓어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넘어서 이제는 ‘나는 오직 내 몸으로 생각한다’는 화두를 몸에 새겨보자.

- 힘들고, 고된 무예 수련 속에 담긴 생의 의미

 그대 왜 무예를 수련하는가? 그대 무엇을 위해 무예를 수련하는가? 라는 질문을 누군가에게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다. 아니 내 스스로 그 답을 찾기 위해 낮에는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고, 밤에는 병서를 펴고 공부한 세월이 30년에 가깝다. 철모르던 열아홉 언저리에 시작한 수련을 벌써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었어도 계속하고 있다.

어찌보면 참 어리석은 삶일지도 모른다. 이미 세상은 인공위성이 우주를 날고, 단추 하나만 누르면 지구 전체가 초토화될 엄청난 메가급 폭탄들이 즐비한 시기에 굳이 칼 한 자루, 화살 하나에 신명을 바치는 삶이라니... 

전쟁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칼보다는 총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직하게 칼이 만들어낸 명쾌한 선 하나를 찾기 위해 새벽까지 동일한 자세를 수천 아니 수만번 몸으로 반복하는 일은 어찌보면 참 쓸데없는 행위처럼 느껴질 수 도 있다. 아마도 단순히 먹고 사는 생계를 위하는 일이었다면, 이 보다 더 쉽고 편한 삶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별로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큰돈을 벌 가능성도 거의 없는 무예를 ‘업(業)’으로 삼는 일은 참으로 참으로 바보같은 삶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자호(自號)가 ‘지과치(止戈痴)’다. ‘무(武)’라는 글자를 파해하면 ‘지과(止戈)’라고 하여 ‘창(전쟁)을 그치게 하는 일’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무예만 아는 바보-지과치’다. 혹은 ‘무예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도 담겨 있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도 어디선가 비록 『무예도보통지』에 담긴 무예24기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무예를 수련하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자그마한 변명 아닌 변명을 풀어보려 한다. 무예의 역사 속에서  이 시대, 지금 수련의 의미를 찾아보자.

임진왜란, 16세기 동북아세계대전으로 불릴 정도로 조선·명·일본 삼국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웠던 처절한 전쟁의 기억 속에서 무예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언급된다. 당시 조선군의 무예가 일본군의 창칼 앞에서 무너져 내리자, 조선은 원군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사들에게 급히 보다 실전적인 무예를 배우게 된다. 그 기록이 임란 중이었던 1598년에 편찬된 『무예제보』에 담겨 있다.

조선은 일본군의 전술을 파해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임시조직인 훈련도감을 만들었다. 그곳의 실무직인 낭청(郎廳)을 맡았던 한교(韓嶠)가 파병 나온 명나라 군영 막사에 가서 직접 묻고 다닌 것이었다. 특히 명군의 중간 지휘관격인 허유격(許遊擊-허국위<許國威>)에게 무예 수련의 묘리(妙理)가 무엇인지 물어본 기록이 「기예질의」라는 항목으로 남게 되었다. 그 내용이 자못 중요했던지라, 이후 정조 14년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도 그대로 옮겨 놓게 된 것이다.

그때 한교가 찾아가 무예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을 하던 중, 무예의 묘리가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물러본 것이다. 어찌보면, 참으로 당돌한 질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느닷없이 무예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라고 물어본다면 쉽게 답하기 곤란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허유격의 대답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말하길, “투박한 것부터 점점 정교하게 변화는 것인데, 수법(手法), 족법(足法), 신법(身法)의 묘리는 직접 몸으로 배워 익혀야만 알 수 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반드시 오랫동안 수련을 쌓아야만 깊은 이치를 얻게 되니 일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이는 비법이 아니다.”라고 얼버무렸다. 마지막에는 말로만 설명하기가 난해한 것이라며 손사래를 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한교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금 간곡히 대강이라도 설명해주라고 부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당장 조선군들이 일본군의 창칼에 도륙당하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실질적인 배움을 얻어야만 나라를 구할 수 있겠다는 목적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 담력과 힘, 정교함과 빠름

이리 간절하게 물어 오자, 그가 딱 4가지를 언급했다. 

“일담(一膽), 이력(二力), 삼정(三精), 사쾌(四快)”

실로 담백하면서도 명쾌한 답변이다. 그 내용을 하나씩 짚어보면 지금 이 순간도 아니 미래에도 무예수련이 여전히 의미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가 담(一膽), 즉 용기다. 우리는 “간담이 서늘하다”는 말을 흔히 한다. 전통시대에는 간장과 쓸개에 용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담력은 예로부터 무예의 요체 가운데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실제 전투상황과 직결된다. 창칼이 번득이고 화살과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는 담력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담력이 부족한 병사는 실전에서 주변의 전우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아군에 득보다는 실이 되는 경우가 많다.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과학화, 전자화, 기계화가 되었다고 해도 군인들이 직접 전장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담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무슨 전투가 되겠는가. 지금 무예 수련에서도 가장 먼저 채우는 것이 단단한 삶에 대한 의지를 무예에 투영시키는 것이다. 이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좀 더 단단한 몸과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무예수련의 이유는 ‘단단한 맘 만들기’다.

두 번째는 힘이다(二力). 담력을 어느 정도 갖게 된 사람은 반드시 ‘힘(力)’을 기르는 훈련으로 나아가야 한다. 조선시대의 전투는 맨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병장기를 들고 하는 것이었다. 무거운 병장기를 자유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힘이 있어야 했다. 현대전에서도 보병이 완전무장을 하려면 그 무게는 최소 25kg이상의 군장을 짊어지고 두 다리로 이동해야 한다. 만약 힘이 없다면, 제아무리 성능 좋은 무기라도 제대로 구동시킬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세상살이에서도 두 다리로 버틸 최소한의 체력이 있어야만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다. 그래서 두번째, 무예 수련의 이유는 ‘단단한 몸 만들기’다.

세 번째는 정교함이다(三精). 용기를 갖추고 힘을 기른 후에는 이를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하고 그 힘이 태산을 무너뜨릴 정도로 거세다면 일단 절반의 승리는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각 군사들의 무예실력이나 진법훈련이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하다면 어느새 상대방의 공세에 틈을 보이고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세상살이에서도 의지도 있고 체력도 충분하지만, 정교하지 못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정확하게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상대의 장단점을 정교하게 분석해야만 삶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무예 수련의 이유는 ‘정교한 몸과 마음 만들기’다.

마지막은 바로 신속함이다(四快). 실전에서는 빠르고 통쾌한 원 펀치를 준비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나아가 적의 창칼보다 빠르게 움직여야만 전투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적보다 총알이나 화살을 더 빠르게 쏴야만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현대전에서 정보전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다 빠르게 전선의 상황을 분석하고 상대보다 한발 앞서 전술을 펼칠 때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네 삶에서도 신속한 의사결정이 중요한 때가 많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신속한 판단이 없다면, 잘못하면 상투잡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래서 네 번째, 무예 수련의 이유는 ‘재빠른 몸과 마음 만들기’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골고루 조화롭게 발달해야지 한쪽에만 몰두하면 곤란해진다. 만약 다른 모든 것은 뛰어난데, 용기만 없다면 아예 시도조차도 못하고 끝날 것이다. 역시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한데 용기만 있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만용’이라고 한다. 그냥 돌진하면 처참하게 부서질 뿐이다. 반대로 용기, 힘, 정교함이 모두 부족한데 빠르기만 해서도 곤란하다. 이런 자는 전투에서 전우를 버리고 가장 먼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아니 미래에도 여전히 무예수련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비록 칼과 활을 들고 전투에 나가지는 않지만, ‘담력정쾌(膽力精快)’를 가장 올곧게 수련할 수 있는 것이 ‘무예(武藝)’라는 것이다. 그것이 ‘지과치’라고 불리는 필자가 무예를 공부하고 수련하는 본질적인 이유다. 거기에 혼자 수련하든, 여럿이 함께 수련하든 즐겁기까지 하다. 이 정도면 무예하는 이유로 충분치 아니한가? 생각 같아서는 수원시민 뿐만 아니라, 지구인 모두가 무예를 배우고 익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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