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익산시 여산면에 있는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에 다녀왔다. 이곳에서는 제42회 가람시조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가람시조문학상은 시조시인에게 주는 최고 권위의 상이라고 한다.
‘현대시조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람선생은 시조 중흥의 기틀을 다지고 시조의 현대적 혁신을 위한 새로운 운동을 펼쳤으며 스스로도 수많은 시조를 창작했다. 존경할만한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이기도 하다.
올해 가람시조문학상 대상 수상자는 수원 오목내 출신 진순분 시인이다. 지난 2019년엔 내 친구 정수자 시인이 이 상을 받았는데 그 역시 수원사람이다. 물론 그 때도 지역 문인들과 함께 수상을 축하하러 익산에 갔었다. 자랑스러웠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다.
진순분 시인은 내 동네사람이다. 그의 집은 오목천동 남중(현재의 영신중·고교) 앞 길가였다. 시인의 모친은 거기서 가게를 열어 생계를 꾸렸다.
나는 거기서 서쪽으로 1km 쯤 떨어진 수영리라는 곳에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 ‘스터디 홀’이란 강제 자습시간 때문에 항상 막차를 타야 했는데 그 차의 종점이 오목내였다.
늦은 밤 인적이 끊긴 캄캄한 시골길을 걸어 수영리로 가다보면 오목내 끝부분에 진 시인이 사는 집이 있었다. 어떤 때는 가게 문이 열려 있어 위안이 됐지만, 춥고 바람 부는 날 일찍 문을 닫아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불빛 하나 없는 적막강산이 펼쳐졌다.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진 시인의 집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거기서 진 시인을 만난 기억은 없다. 그러나 이번 시상식에서 그의 어머니 얼굴을 뵙는 순간 낯이 익었다. 저 먼 기억 속 흐린 10촉 전구 불빛 아래 보았던 그 얼굴이 겹쳤다.
이번 시상식에서 시인은 수상소감의 많은 부분을 어머니 이야기로 채웠다. 수상 소감은 물기가 가득했다. 딸이 울먹울먹 간신히 울음을 참아가며 말을 이어가는 동안 모친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시인은 몇 년 전 한 신문 칼럼에서 자신을 “어머니의 기도로 살아온 사람”이라고 했다. “4남매를 굶기지 않으려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어떡해서든 자식들과 살아야 했다. 젊은 어머니에게 눈물은 사치에 불과하였다”고 밝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단어는 ‘어머니’라고 했다.
사뿐히 소나무에 올라앉은 초승달/어머니 어깨 위에 얹힌 사 남매 무게/평생을 짊어진 채로 뼈 다 닳은 바람벽//눈물도 사치였던 뒷모습이 울먹인다/낙타처럼 짐 진 채 온몸 다 내주고도/늙어서 더 짐이 될까 “괜찮다, 다 괜찮다.” -진순분, ‘짐’ 부분
이번에 그가 상을 받은 작품은 ‘이인칭으로 부르면’이다.
고요히 너 부르면 바다 펼친 푸른 서책
물결이 차고 넘쳐 밀물지는 갓밝이쯤
그 눈빛 중모리장단 속속들이 파고들지
하마 올까 예감의 촉 간절히 너 부르면
돋을볕에 돋는 시어 마음 모서리 환해지고
때마침 휘몰이장단 문장 하나 몰고 오지
늦게 피어 뜨거운 피 삭이는 밤이 오면
그 바다 품에 안긴 사유도 깊어가고
또바기 진양조장단 벼름벼름 받아쓰지
진시인은 1990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와, 1991년 문학예술신인상 시, 1993년 한국시조 신인상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내가 1978년에 등단을 했으니 나보다는 십몇 년 뒤에 등단한 것이지만 내가 워낙 어린나이에 문단에 나왔으므로 늦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늦게 피어 뜨거운 피’를 가진 시인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의 시조를 향한 열망은 한층 치열해지고 시적 성숙도는 날이 갈수록 빛나고 있다.
이번 수상작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도 “2인칭을 향한 애절한 사랑과 마음을 여러 장단의 음악으로 담아낸 예술적 의장이 돋보이는 명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시조시인협회상 본상, 윤동주문학상, 올해의시조집상, 시조시학상 본상, 한국시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동안 ‘안개꽃 은유’, ‘시간의 세포’, ‘바람의 뼈를 읽다’, ‘블루 마운틴’, ‘돌아보면 다 꽃입니다’, ‘익명의 첫 숨’ 등 시집도 여러 권 출간했다.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 기적처럼 저에게 다가왔다” “지금껏 초심의 자세로 시조를 써 왔듯 그 마음 흐트러지지 않게 다잡아 쓰겠다”는 진순분 시인, 수상을 축하한다. 맥주 한잔, 아니 두잔 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