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화가 나혜석은 독립운동가였다

'조선애국부인회' 회원으로 활동 만주서 소품팔아 독립군자금 도와생가터에 동상 세워 후손에 귀감 민족위한 예술활동 높이 평가돼야

 

지난달 서울의 한 경매회사에서는 박수근의 작품 한 점이 45억2천만원에 팔렸다하여 미술품, 특히 서양화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지만 한편에서는 극소수 특정화가 작품으로의 지나친 쏠림현상은 머지않아 한국미술시장의 심한 불균형을 초래할 것으로 염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를 비롯한 선진 국가에서는 화랑이 중심이 돼 작가와 애호가들을 연계하고 작품을 중계하며 대성할 수 있는 화가를 발굴하여 지원하면서 세계적인 예술가로 키우고 있음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서양화 몇 종과 몇 명의 신예작가들만 빛을 보고 있는 경매시장 때문에 이대로 간다면 대다수의 작가들이 예술활동을 계속하기조차 어렵게 된다는 인식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김관호의 작품 ‘해금강’의 감정소견을 의뢰받아 부속서류를 검토하다가 실로 귀중한 자료를 발견하게 됐다.

화가 나혜석이 ‘조선애국부인회’ 회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의 소유자였던 최숙자(일명 최갑순)씨가 밝혔기 때문이다.

1920년 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김관호 작 해금강(45.5×38cm)의 소장자였던 그는 출생시기가 나혜석과 같은 해(1896)이었으며 1908년 4월 순종의 칙령으로 세워진 최초의 관립여학교인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정신여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3.1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간 옥중생활을 했는데 ‘조선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하고 대전국립묘역에 안장된 독립 운동가였다.

그가 나혜석도 ‘조선애국부인회’ 회원임을 밝혔는데 나혜석이 같은 시기에 정신여학교 교사를 역임한 것으로 봐  그때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에 대해 세심히 살펴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나혜석의 생애를 더듬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10년의 행방불명의 시기가 있는데 1935년부터 1944년까지가 그 기간이다.

1986년 4월 수원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1913년 동경에 있는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하고 1년간 휴학기를 거쳐 1918년 서양학과를 졸업한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고 국내에서 작품전시회를 하는 등 적극적인 작품활동을 하다가 1923년 남편과 함께 당시 만주땅으로 간다.

기록이나 소문에 따르면 만주에서 몇 차례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때의 작품들은 거의가 소품으로 대도시를 찾아, 가지고 다녔거나 당시 만주에 거주하던 동초들에게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판매한 그림 값은 독립운동에 보탰다는 일은 동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그 후 2년동안 남편과 함께 구라파 여러 나라를 돌면서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하고 돌아와서도 의욕적으로 활동했기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는데 자화상, 스페인국경, 화가촌 나무 시리즈, 정원, 작약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전시작품으로 창가에서, 소녀, 선죽교, 인천풍경, 수원서호, 시골풍경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936년부터 1944년까지 나혜석은 자취를 감춘다. 많은 사라들은 그의 애국사상과 애국부인회 활동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33인 중 한사람이었던 채린 선생과의 염문으로 인한 실망 때문에 방황했으리라 믿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의 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주에서 많은 작품을 동포유지들에게 팔았다는데 그 그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점이다.

그림은 누구나 자랑스럽게 소장하는 재산인데 하나같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그림값이 독립자금으로 들어간 사실이 알려지면 당시의 일본군대에서 그냥 둘 리가 없었고 매입한 사실이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매입자 역시 고문을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혜석의 작품은 자취를 감출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조선족 간부 황모씨는 나혜석의 그림 한점을 표구도 하지 않고 책갈피 속에 끼워 장롱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일제시대 만주에서 학교를 세웠던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했다.

나혜석 또한 자신이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밝혀지면 유관순 열사의 경우에서 보듯 신체를 훼손하는 모진 고문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정신병자처럼 보이게 하고 종적을 감췄을 것이다.

고문에 못 이겨 실토라도 하는 날에는 본인의 불행은 물론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작품을 구매한 동포들의 불행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향해 조여오는 일본 헌관을 피해 결행한 10년간의 잠행과 방황은 감당하기 어려운 병을 얻어 1944년 서울 세검정 소재 청운양로원에 행려병자로 수용됐고 1948년 끝내 자기를 밝히지 않고 무연고자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제 수원시가 나서야 한다. 이왕 생가도 보존하고 나혜석 거리도 지정했으니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

당시에는 일본관헌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증거를 찾기가 어렵겠지만 물증확보에 노력해 생가터에 동상이라도 세워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게 해야지 초창기의 한 사람 여루화가로만 알리려 하는 것은 그 분에 대한 도리가 아닐 것이다.

박래현, 전경자, 이숙종 등 한국을 대표하는 분들이 유학했던 나혜석의 모교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도 뒤늦게나마 그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니 반가운 일이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또 하나의 과제는 우리 미술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혜석, 김관호와 같이 민족을 위해 예술활동을 한 작가와 작품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일이라 하겠다.

남몰래 독립자금을 보태고 끝까지 자신을 희생한 화가 나혜석, 이제 우리가 그의 영혼에 경건한 마음으로 향을 피워야 할 때가 아닌가?

객원 논설위원/ 편영우(인민일보 해외판 한국발행인·중화문화연구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