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0대 청소년들은 가난했던 50∼60년대 얘길하면 믿질 않는다. 딴나라 얘기로 생각한다. 불과 40∼50년 전의 사실인데도….”
한민족의 근현대사중 가장 큰 비극인 한국전쟁 역시 이들에겐 역사적 사건일 따름이지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합법적으로 얼마든지 오고갈 수 있는 북한이 분명 다른 사상과 이념아래 자유 민주체제를 적대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가볍게 생각한다. 용공, 친북이란 단어가 아무런 제제없이 사용되는 현실에서 국가, 안보, 자유와 평화가 어떤 것들이고,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것인지 고민하며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통일은 분명 우리 민족이 반드시 이룩해야 할 대명제지만 그러나 비무장지대 저너머 체제는 항상 남조선 혁명통일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70대 노인들이지만 중학교 3·4학년, 17·18세 때 한국전쟁 피난길에 의용병으로 나서 목숨을 걸고 지금 이땅을 지켜낸 군번없는 세명의 병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너무나 크게 들려온다.
지난 13일 팔달구 인계동의 수원 현충탑을 찾은 이재열(73), 김충국(73), 송근억(74) 선생(6.25 참전용사 동지회 수원지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7년이 흘렀건만, 이들이 떠올리는 당시의 기억은 어제 처럼 또렷했다.
“전쟁이 터진지 2개월도 안돼,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 밀려 살기 위해 남쪽으로 밀물처럼 피난을 떠났지. 이때 ‘전선’으로 뛰어든다는 건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이들은 고향인 충남 연기군과 충북 청주시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피난길에 있었다.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나라를 다시 찾았는데, 또다시 전쟁으로 나라를 잃을 순 없잖아.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생 나이였지만, 이 한 몸 바치겠다는 애국심으로 자원한 것이지.” (이재열 선생)
참전 연합국인 프랑스 대대에 배속돼 ‘철의 삼각지대’로 유명했던 오성산, 백마고지 등 전장에 참전한 이재열 선생은 이름 없는 많은 병사들의 희생 때문에 자유 민주체제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재열 선생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수의(壽衣) 대신 군복과 군화까지 신겨달라는 유언을 미리 남겼다면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나라사랑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마산으로 피난 내려온 상황에서도 입대를 자원해 통신병으로 참전했던 송근억 선생 역시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다”며 “뚜렷한 국가관이 없었다면 참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후 세대들이 삼일절과 현충일, 광복절 등 의미를 되새기고 호국영령을 추모하며 어떻게 나라가 지켜지고 존재했는지 생각해 주고 최소한 태극기라도 게양하는 정성을 가졌으면 좋겠어.” (송근억 선생)
재향군인회에서 안보 강사를 맡고 있는 김충국 선생은 한국전쟁 이후 57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갈수록 젊은 세대의 안보 의식이 희박해지고 있다며, 너무 통일지상주의로 모든 것이 흐르는 것 같다고 오늘의 세태를 경계했다. 그는 북한에 대한 지나친 감상주의적인 접근이나 무조건 퍼주기식의 지원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무명(無名) 용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며 지킨 자유 민주주의와 이 나라를, 이젠 전후 세대가 잘 이끌어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 (김충국 선생)
현재 이재열 선생은 1985년 강원도 홍천에서 전역(준위)한 이후, 송근억 선생은 1984년 용인에서 군생활을 끝내고 각각 수원에 정착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김충국 선생은 1957년 상사 전역 후 수원에서 개인사업을 하면서 살고 있다.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두들 애국심에 불타 기꺼이 전쟁에 뛰어들었지. 마지막 배수진을 쳤던 낙동강 전투에서부터 휴전 직전까지 한 치의 땅이라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의용병, 소년병의 희생을 기억해줬으면 해.”
프랑스 연합군 장교도 나라를 위해 전장으로 향한 한국인의 애국심에 깊은 감명과 경의를 표시했었다는 이재열 선생의 증언은, 지금 우리가 호흡하는 자유로운 공기가 고귀한 희생이 물려준 소중한 유산(遺産)임을 잊지말라고 가르쳐주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