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선언을 하기 위해 손병희, 신복순, 최남선, 현상윤 등은 한해 전인 1918년에 최린(崔麟)의 집에서 몇차례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 역량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은 독립을 외치며 모두 뭉쳐 하나가 됐는데 이 일을 주도하다시피한 최린은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동경제일중학교를 졸업하고 명치대학법과를 마친 후 귀국한 인물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3.1운동 직후에는 모든 국민이 뜻을 합쳐 독립운동을 하게 됐는데 국내보다는 중국의 상해나 만주를 중심으로 한 단체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동경에서 미술대학을 나와 최초의 여류화가가 된 나혜석도 1923년 남편과 함께 만주의 안도현으로 갔다. 길림성 안도현은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 아래 미인송(美人松)이 군락지를 이룬 나지막한 산촌으로 농토가 비옥하고 조선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해 살고 있던 곳이다.
지금은 교통수단인 자동차가 많아졌고 도로도 잘 정비돼 연길에서 출발하면 하룻동안에 백두산을 다녀올 수 있게 됐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안도현의 이도백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다시 출발하며 백두산을 오르곤 했기에 한국의 많은 관광객들에게 익숙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호텔은 물론 쓸만한 여관도 없어 식당을 겸한 민박집 같은데서 묵어야 했는데 비라도 오는 날에는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어서 주인 가족들과 술잔을 나누면서 밤새워 옛날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흔한 곳이었다.
여기서의 이야기란 조상들이 겪은 일제의 탄압에 관한 내용이 전부인데 나이드신 할머니들이 전해 들었던 독립군의 승전 이야기와 함께 내어놓은 술안주는 단고기(개고기를 여기서는 이렇게 부른다)무침과 김치가 전부이지만 가슴 조이며 듣느라고 밤이 새는 줄을 모른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곳을 독립운동야사가 흘러내리는 곳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이곳 동포들의 생활실태 또한 가난하고 선량한 동포들이 옛날 그 방식대로 서로를 아껴가며 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곳에서 수년에 걸쳐 십여차례 이상을 머물러야 했는데 한국에서 찾아오는 지인들의 백두산 등반을 안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중 이곳에서도 ‘환쟁이 아낙네’이야기를 들었고 국내에 돌아와 수소문 끝에 그가 여류화가 나혜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고나면 언제나 아들 며느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 운영하는 식당의 메뉴(단고기국) 때문에 삶은 개고기를 하루종일 손톱으로 찢어야만 했기에 손톱이 한쪽만 닳아 아프다면서 “나를 어디로 좀 데려다 달라”고 조르던 그 할머니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화가 나혜석도 이곳에 살면서 자신이 지닌 능력으로 잃어버린 나라를 찾는데 최선을 다 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때는 모두들 그리했었으니까.
그리하여 조선애국부인회에 가입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당시에 독립자금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 어려워서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형 선생 가족은 국내의 전 재산을 팔아가지 않았던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화가의 능력이 대단했을 것이다.
움직이면 작품이 되고 작품은 곧 현금이니까 누구보다도 간편하게 도움을 줄 수 있음은 물론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널리 알려서 독립운동하는 분들이 직접 참석하거나 혹은 대신 참석케 해 당시의 상황정보를 교환하는 장소로 활용하는데에 관동군의 감시를 어느정도는 비켜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애국부인회가 상해의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생각할 때 당시 만주에서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싶은 동포들에게는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편리한 통로였을 것이다. 다만 그림을 한 점 산 일로 보였을테니까.
그렇다면 나혜석도 회원이었다는 조선애국부인회는 당시 어떤 조직이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3.1운동 직후에 조직된 애국여성단체로 3.1운동 직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투옥되자 옥중지사(獄中志士)들과 그 가족을 돕기 위해 황해도 재령의 명신여학교 교사 오현관(吳玄觀), 군산의 에메리볼덴 여학교 교사 오현주(吳玄洲), 세브란스병원의 간호사 이정숙(李貞淑) 등이 뜻을 모아 처음에는 혈성단 애국부인회라 부르면서 주로 의연금을 모집해 투옥된 애국지사들에게 식사도 차입하고 가족들을 도와주는 일을 계속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부인들이 동참의사를 전해와서 점차 확대돼 각지에 지부를 두게 됐고 직접 독립운동에도 참가하는 회원들이 늘어나게 됐다. 이렇게 해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모집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고 뒤에는 이병철(李秉澈), 임창준(林昌俊)이 지도하고 있던 대조선 애국부인회(大朝鮮 愛國婦人會)와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애국부인회(약칭 애국부인회)로 개칭하고 더욱 조직확장에 노력해 활발하게 운동이 전개됐으나 일제의 정보망에 걸려 많은 회원들이 일제히 체포되고 악독한 고문 등의 탄압이 계속되자 소리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이때 나혜석도 자신을 향해 밀어닥칠 관동군의 핍박이 두려웠을 것이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지(四肢)의 일부를 훼손하는 등의 고문에 대한 소식은 귀하게 자라(군수의 딸로 태어나 일본유학을 마친) 예술가가 된 그녀에게는 죽음 이상의 공포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1926년 그는 남편 김우영과 함께 홀연히 만주를 떠나 파리로 간다. 작품활동을 통해 독립자금을 보태고 전시회를 열어 정보교환의 장소로 제공한 일이 탄로나 그림공부를 빙자해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라는 명분으로 떠돌이 생활을 각오하고 피신을 한 것이다.
본인이 체포라도 되는 날에는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애국지사들에게 미칠 참화가 예견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스스로 퍼뜨린듯한 최린과 염문(艶聞)에도 의문을 갖고 살필 필요가 있다.
파리에서 돌아온 1928년은 그녀의 나이 32세인데 왜 하필 50세가 넘은 민족지도자 최린이 상대였단 말인가.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손병희 등과 자기집에서 독립선언문을 함께 작성하고 33인이 한 가운데 서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3.1운동 직후 3년여의 옥고를 치른 최린은 나혜석에게는 하늘같은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스럽게 우뚝 서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34년 최린이 변절해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가 된 후에도 두사람의 관계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고 믿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파리로 간 그는 이웃 여러나라를 돌면서 그가 배운 초기의 화풍을 완전히 바꿔 버린다.
1874년 모네(Monet)가 그린 그림의 제목에서 유래했다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인상주의(印象主義)화풍으로 그린 초기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야수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인상파의 세밀한 색조분할 수법과 부드러운 묘사기법과는 완전히 다른 굵은 선과 원색적 색체가 특징인 야수주의 화풍은 20세기 초 프랑스 반(反)아카데미파의 화가들이 시작한 회화의 경향으로 마티스, 드랑, 루아 등으로 대표되는 대담한 혁신적 경향이었다.
온순하고 나약해 피지배자가 돼버린 민족의 한을 품었기에 강인한 지배자의 꿈을 담아 굵은선과 원색적 색체로 작품을 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작가가 누구인지를 일반인은 알 수 없는 사인기법(I-R=H+R)도 특이하다. 이 또한 소장자를 보호하려는 깊은 뜻이 담긴 듯 하다.
편영우(인민일보 해외판 한국발행인·중화문화연구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