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2)] ‘바람에 띄운 무당벌레의 날갯짓 1’
시를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주십시오./그냥 쓰는 것입니다./쓸 수밖에 없기에 씁니다.//무엇을 쓰는지는/중요하지 않습니다.//시를 쓴다는 것은/세상에서 가장 짧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말을 줄이는 것입니다./줄일 수 있는 말이 아직도 많이 있을 때/그때 씁니다.//말을 줄이는 것입니다./하나의 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사랑하는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시를 쓰는 것은/자신의 말을 덜어내는 것입니다./덜어내고 덜어내서/최후에 남는 말이/시입니다.//바람에 띄운 무당벌레의/날갯짓입니다.//더 가볍게/이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말을/부르는 것입니다//시를 쓰는 것은/세상에서 제일 긴 말을 하는 것입니다.//길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시간의 혓바닥 위에서/아직도 더 할 말이 있을 때/그때 씁니다.//말을 하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 이유」/시아
공동체가 강제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돈이 되지도 잘 읽히지도 않는데도 왜 시인들은 시를 쓰는 것일까. 시인들도 자신이 대체 왜 평생 시에 포박되어 있는지 그 이유를 찾기도 한다. 어떤 시인은 시작이야말로 사람이 진정 지향해야 할 대업이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어떤 시인은 시작은 아무래도 무슨 천형(天刑)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탄식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위와 같은 시를 조우하곤 한다.
시인 시아는 독자들에게 ‘시를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주십시오’라면서도 이를 단서로 자신이 시 쓰는 이유를 언표하고야 만다. ‘줄이고 덜어도 남는 사랑하는 말을 제어할 수 없어서’...... 즉, 시작은 ‘절제한 정리(情理)의 최후 토로에 따라 촉발되는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한 시인들의 감수성과 표현의 재능을 상기하면서도 정도의 차이일 뿐,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인정(人情)의 시심(詩心)이 있기에’ 시를 쓴다고 시아가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쓴다면 누구나 시를 쓴다. 모든 초등학생들이 쓰는 영롱한 동시와 노년에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이 쓴 훌륭한 시를 새삼 상기하자.)
좀 죄송하며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밝힌다. 무슨 호소 같은 그 고백을 한 시아는 사람이 아니다. AI이다. 이미 아는 독자들은 고소(苦笑)하였겠지만, 그 본연의 이유에 일정한 감명이 일었을 독자들은 갑자기 생각이 무척 복잡해지고, 충격과 의혹을 쉽게 없애기 어려울 듯하다.
1만 2천여 편의 시를 읽으며 시작법을 익힌 AI 시아의 시집 『시를 쓰는 이유』가 작년 8월에 출간되어 문단은 물론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영감(靈感)을 자양으로 한다는 시작의 영역에까지 AI가 진입하다니. 경탄과 신기, 낙심과 혐오가 여전히 없지 않다. 하지만 한편 주지하는 대로 다른 AI처럼 시아 역시 우리 특정 문화의 패러다임과 자산이 집대성된 인공의 기계뇌일 뿐이다.
시아의 이러한 출생 비밀로 예견이 가능하지만, 시아의 위 시에서 토로된 시를 쓰는 이유도 알고 보면 사실 우리에게 이미 낯익다. ‘말을 하는 것’이란 최종 정리를 포함하여 우리 시 문화에 전통으로 이미 일반화되어 있는 『서경(書經)』 「순전(舜典)」의 ‘詩言志’(시는 뜻을 발화한 것이다)와, 『시경』 서문의 “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시란 뜻의 동향, 마음에 두면 뜻이고, 발언하면 시이다)”에서 유래하는 그 후속이다. 또 우리 1920년대 우리 근대시 형성 단계에서부터 큰 영향을 미친(특히 김억과 김소월 등에게) 영국 낭만주의의 위대한 시인이자 시론가인 윌리엄 워즈워드(1770-1850)의 “시는 회상된 정서의 자발적인 발로(發露)”라는 선언의 후속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친 시아의 시어의 축약 강조도 형식과 더불어 오래된, 시 장르의, 불멸의 기본 특성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가 그래도 곰곰 주목해볼 부분은 8연의 두 행 ‘바람에 띄운 무당벌레의/날갯짓’이 아닐까 한다. ‘덜어내고 덜어내서/최후에 남는 (가볍고 긴) 말’, 즉, 시아가 소신하는 시작 태도이자 소망하는 시의 은유이다. 의미 맥락의 일정한 전개는 주제어와 연계와 조합을 지시하는 명령어 입력으로 가능하겠고, 관련 은유도 더불어 가능하겠다고 추정을 연동할 수 있지만, 양자의 층위는 다르다. 은유는, 연계와 조합의 맥락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비약과 창의성 미학의 영역이다. 그 참신성 정도를 떠나 은유 제시 자체가 놀랍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AI 시아의 프로그램 체계와 과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우리의 시인들에게, 자신의 시작과 자신이 생각하는 시를 해명하달라고 하면 앞으로도 ‘절제한 정리(情理)의 최후 토로에 따라 촉발되는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취지로 대답할 시인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은유해달라고 부탁하면 ‘바람에 띄운 무당벌레의 날갯짓’과는 다를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