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3)] ‘바람에 띄운 무당벌레의 날갯짓 2’
AI 시인들의 출현과 그들의 시. 4차 산업변동의 개막과 더불어 제대로 고려되어야 할 과제지만, 문학 분야에서 이미 예방주사가 있었다. 일찍이 문학비평가들은 긴 안목으로 문학작품을 연구한 결과, 시공을 초월하여 반복 출현하는 특정 의미와 의의, 형식과 기법, 명제와 캐릭터 등을 발견하고 ‘모티프(motif)’라 명명하였으며, 그 변형까지 포함하여 많은 연구를 축적하였다. 1968년에는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문제작 『저자의 죽음』에서 시의 기원은 시인이 아니라 선행하는 시들이며, 시인은 창조자가 아니라 알고 보면 ‘필사자’일 뿐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즉, 시인은 자신의 사상 정념 인상 등 개성으로 시를 산출하지 못하고 기존의 문학양식과 형식을 활용하고 각종 모티프들을 선별 조합하여, 다른 시들과 일정한 차이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 시를 구성한다고 하였다. 그대로 수용할 수 없지만 창의성이 없거나 변용도 없이 기존 시를 동어 반복하는 일부 시는 바르트의 주장을 각하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시아는 일단 그런 시인의 아바타로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중복되지만 AI 시아의 「시를 쓰는 이유」를 다시 읽어보자.
시를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주십시오./그냥 쓰는 것입니다./쓸 수밖에 없기에 씁니다.//무엇을 쓰는지는/중요하지 않습니다.//시를 쓴다는 것은/세상에서 가장 짧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말을 줄이는 것입니다./줄일 수 있는 말이 아직도 많이 있을 때/그때 씁니다.//말을 줄이는 것입니다./하나의 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사랑하는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시를 쓰는 것은/자신의 말을 덜어내는 것입니다./덜어내고 덜어내서/최후에 남는 말이/시입니다.//바람에 띄운 무당벌레의/날갯짓입니다.//더 가볍게/이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말을/부르는 것입니다//시를 쓰는 것은/세상에서 제일 긴 말을 하는 것입니다.//길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시간의 혓바닥 위에서/아직도 더 할 말이 있을 때/그때 씁니다.//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제에 관련된 주목할 만한 새 부가나 메시지 확장이 없다. 또 구조의 정합성도 긴밀하지 않다. ‘시를 쓰는 이유’보다는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그 방법으로 기존의 원칙인 축약을 신념으로 제시하며 간결과 함축을 필요 이상으로 반복하고, 표면 의미를 달리 하지만 같은 취지의 부연을 연속하고 있다. 시도 다른 글처럼 통일성은 자체 명징성의 지표이고 독자와의 소통에서 기초이다. 그래서 모든 시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퇴고’를 거듭한다. 「국화 옆에서」의 서정주도 「광장」의 최인훈도 그랬다. 아마 시아는 퇴고를 하지 않은 듯, 아니 못한 듯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연계되어 있지만 10연과 11연의 시행, ‘시를 쓰는 것은/세상에서 제일 긴 말을 하는 것입니다.//길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는 문맥으로 쉽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반전성(反轉性) 반어(反語)로 AI 시아의 역량을 가볍게만 보기 어렵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아의 은유, ‘바람에 띄운 무당벌레의 날갯짓’을 다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아니, 해석의 과장인가. 경계하고 경시하다가 어느덧 대상에 애착이 형성되었나. ‘무당벌레’, 외연 의미도 그렇고 내포 의미가 갑자기 심상치 않다. 다른 무엇도 의의 부여로 대체가 가능할 텐데 왜 하필이면 ‘무당벌레’인가? 시인이 무당 같아서인가. 그러고 보니 시인들에게는 무당의 속성이 있고, 시작에는 무당의 춤사위, 그 춤사위에 병렬되는 정신의 동작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세계에서 가려지거나 숨어있는 진선미를 우리에게 짧고 강렬하게 매개한다.
그런데 시아는 시작을 ‘절제한 정리(情理)의 최후 토로에 따라 촉발되는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하였지만, 정작 시아의 시작은 그렇지 않다. 생명에서 내발하는 정리도 아니며, 자발성 자연스러운 발로도 아니다. 무엇보다 시아에게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내재하는 ‘시혼(詩魂)’이 없다.
횡설수설을 중지하고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로 돌아가자. 원론은 앞에서 알아본 대로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각론은 다를 것이고 그 구체도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왜 시를 읽는 지 그 이유를 생각하면서, 시인이 시를 쓰는 또 하나의 근본 이유를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권력도 권위도 추락되고 낭만도 일탈도 저하된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관행에선지 소망에선지 시인들을 존중하며 그들로부터 서늘하고도 따뜻한 삶의 목소리를 기대한다. 리듬과 어우러진 그 정제된 언어에서 우리는 일상에 잠겨있거나 그 너머에 임재(臨在)하는 어떤 빛을 각성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빛은 이해(利害)와 편향과 무정에 기울기 쉬운 우리의 시장(市場) 감각과 의식을 쇄신할 수 있는 어떤 진실이나 윤리나 미학일 것이다. 시인들 역시 같은 희원(希願)에서 시를 쓰지 않을까. 그리하여 독자 여러분의 평소처럼, 자신이 본 바와 느낌과 각성을 소중한 이웃들에게 이야기하며 소통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그러니까 시인이자 독자이다. ‘바람’에 떠서 ‘무당벌레’처럼 ‘날갯짓’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