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4)] 원형(原型)의 위의(威儀)
‘칠곡할매들의 시’를 읽었다. 두해 전에 탄생한 ‘칠곡할매글꼴’이 최근에 대통령 부부의 계묘 새해 연하장에 사용돼 다시 화제가 되자, 단아한 몸매로 다소곳한 그 수발한 글꼴을 완성한 할매들과 ‘한글교실’에서 한글을 깨친 동창 할매들이 쓴 시를 다시 감상하고 싶었다. 아시다시피 저 궁핍하고 신산한 해방 전후에 태어나 부엌과 들의 학교에서 가사노동을 시작한 어린 소녀들이, 노년에 이르러 기회가 도래하자, 해질녘의 폭발처럼 자기파괴를 시도하여 운명을 바꾸었다.
내가 살아온 세상 까막눈 세상
눈을 뜨고도 볼 수 없으니까 까막눈 세상
세상을 살다보니 행운이 찾아왔네
한글은 내 인생이다
검은 머리 흰 머리 되어서 눈을 뜨네
밝은 세상 꽃은 피네
내 인생도 꽃 피네 - 「나의 인생」/최영순
우리는 사실 글자 모르는 분들에게 별 관심을 가져보지 않아 그 입장과 심정을 잘 알지 못한다. 화자(話者)의 첫 토로, ‘내가 살아온 세상 까막눈 세상/눈을 뜨고도 볼 수 없으니까 까막눈 세상’에는 회한의 탄식이 나지막한 배음(背音)으로 깔려있다. 그렇다.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까막눈’, 세상의 사물과 표리(表裏)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각막 검은 눈에는 지난 삶의 자취가 아무래도 변방에서 소외된 채 이어졌다는 쓸쓸한 자조의 정서가 흐르고,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세상과의 불투명한 거리가 무연히 개재되어 있다. 화자의 이러한 자기인식을 이해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화자를 보던 우리의 까막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셋째 행의 ‘행운’ 운운에서 대번 반가워하고, ‘한글은 내 인생’이란 느닷없는 활기 찬 선언에서도 순식간에 사정을 헤아리며 화자의 그 자존과 자신의 어조에도 허리 굽혀 공명하며, 이후 토로에도 공감한다. ‘검은 머리 흰 머리 되어서 눈을 뜨네’에는 역설 같은 만시지탄의 유감이 없다. 이제라도 눈을 뜬 다행과 감사로 충만한 내면의 겸손한 안도가 역력하다. 또 화자가 보는, 밝아오는 어두웠던 세계에서 피는 그 ‘꽃’을 우리도 보는 듯하다.
생전에 말도 없다
뭐라꼬 카지도 안한다
그저 웃는 기 다다
그 기 좋다는 표시다 - 「그저 웃는 기 다다」/박월선
생전의 남편을 묘사하기도 하고 자신의 지난 삶을 회고하기도 하는 이 시에서 화자가 자신의 관련 심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금방 친근한 이웃 분이 된 화자처럼 고인이 그립고, 고인의 삶과 인격을 실감한다. 평생 잔소리도 고집도 강요도 없고, 마누라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혹 모난 언행에 빈 바가지를 긁더라도) 사뭇 미소를 짓던 그. 유감과 원망의 기운이 살짝 없지 않지만 남편을 직절하게 추모하며 짐짓 애정을 절제하는 화자. 우리는 작중 두 분에게서 은근히 매력을 느끼다가 두 분을 어느덧 군자와 숙녀로 보기도 하며, 과도한 표현으로 시끄럽고 부산한 요즘 부부관계에 부드럽게 꽂히는 일침을 연상하기도 할 것이다.
드디어 한글을 깨치고 나서 평범한 할매들이 쓴, 눈에 띄는 대로 인용해본 두 시. 완성도가 좀 모자란다, 수사(修辭)가 좀 부가되었으면 좋겠다고 할 것인가. 아닐 것이다. 대체 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두 시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원형(原型)의 위의(威儀)가 다시 우리의 눈을 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