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5)] 임청각(臨淸閣) 대장부의 시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지난 설날 오후에 고향 노모의 슬하에서 설을 쇠다가 예고 없는 방문을 맞았다. 우리 형제가 돗질누님이라 부르는 사촌누나가 외손녀 부부의 조력으로 숙모인 노모를 찾아온 것이다. 누님은 86세, 노모는 96세. 환호 같은 포옹이 이어지고 소파에 좌정한 누님의 노성한 얼굴을 보자 젊은 시절 고운 눈매가 떠올랐다. 일곱 살 때 누님의 시동생의 친구에게 이끌려 내겐 꽤 먼 길을 걸어 누님의 시댁인 안동시 동쪽 낙동강변의 고택 임청각에 처음 갔고, 우물가에서 나를 반기던 누님을 처음 보았다. 임청각을 배경으로 한 그 정경은 흑백사진 필름처럼 내 가슴에 간직돼 있고, 누님을 뵐 때마다 인화되곤 하였다. 그날 내 가슴의 백지에는 그 사진에 이어 유명한 문자도 선명히 부각되었다. “好住鄕園休悵惘, 昇平他日復歸留”. 누님의 시증조부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 1856-1932) 선생이 1911년 1월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면서 읊은 「거국음(去國吟)」의 끝 두 구. 

 20세기 이전 지식인들은 거의 시를 지었다. 도덕과 의리를 지향하는 가운데 시작(詩作)과 창수(唱酬)는 삶의 작고 큰 계기에서 이는 감회를 표출하는 교양이었다. 망국 상황에서 석주는 왜 망명의 선두에 나섰을까. 위정자도 아니었고 조선조 권력의 기득권역에서도 오래 밀려났던 가계였기에 그냥 사태를 관망하며 그대로 있었어도 별 비난이나 죄책이 없었을 텐데... 전답을 처분하고 노비를 해산하고, 불 보듯 명확한 갖은 고난과 역경의 거센 암흑과의 대결을 각오하며 결행하는 망명의 길, 어찌 오백년 전승해오던 고택과 이별하면서 시 한 수 없을 수 있었겠는가.  

 山河寶藏三千里(산하보장삼천리) 보물로 가득 찬 삼천 리 강산 

 冠帶儒風五百秋(관대유풍오백추) 오백년 이어온 유학의 전통 

 何物文明媒老敵(하물문명매노적) 문명을 빙자해 왜적이 쳐들어와 

 無端魂夢擲金甌(무단혼몽척금구) 무고한 영혼들의 나라가 침탈되었네  

 已看大地張羅網(이간대지장라망) 이 땅에 펼쳐진 왜적의 그물 

 焉有英男愛髑髏(언유영남애촉루) 대장부 어찌 이 한 몸 아낄까

 好住鄕園休悵惘(호주향원휴창망) 잘 있어라 고향 땅아 슬퍼말아라

 昇平他日復歸留(승평타일부귀류) 태평세상 되는 날 돌아오리라 

 오늘 젊은 세대에게 한시는 국역이 제시돼도 우리 시대의 호흡과는 다른 화자와 주제와 표현방식에서 현대시도 의식하며 거리를 느끼는 듯하다. 그러나 과도한 수사의 옹위와 착잡한 의미의 애매에 지친다면, 선조들이 의사를 평명하게 표출한 시에서 격조와 지취에 자신을 조응시켜 그 전이를 잘 내면화할 수 있다.

오늘의 일부 시에서도 그렇지만 전래 한시의 화자는 시인이기 쉽다. 이 시의 화자도 시인이 창조한 허구 인물이라기보다는 이 시를 읊는 시인이다. 무엇보다 망명 결행이 이어지기 때문. 여기서 이런 지적은 하나마나한 사설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시의 화자와 시인을 문제의식 없이 쉽게 일치시키는 관행이 있다. 각설하고, 이 시에서 석주는 1, 2행에서 수려한 삼천 리 금수강산과 오백년 유학의 역사를 상기하고, 일제의 금속성 폭력 강점과 망국을 다룬 3, 4행을 대조시켜 그 도저한 파탄의 낙차를 재차 의식한다. 5행에서 석주는 일제의 압제를 한반도에 고착된 강고한 그물로 비유하여, 주권과 자유를 상실한 민족이 곧 어육이 될 처지라고 통절하게 함축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55세 석주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단한다. 6행에서 대장부의 기개로 자신의 목숨에 어떤 미련도 없다며 망명 결심을 단호하게 토로하며 독립운동에의 매진을 시사한다. 그리고 7행에서 고향 안동 일원을 인격으로 마주하며 별리의 정서를 헤아리고 위로하고, 8행에서 국권회복을 성취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1919년에 서로군정서의 독판에 취임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였으며, 1925년에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기도 한 석주는, 1932년 6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라”고 유언하고 서거하였다. 백척간두에서 자신을 격려하기도 한 그 약속을 석주는 이행하지 못한 것일까. 1990년에 증손들에게 의탁하여 드디어 석주의 혼령은 유해와 임청각으로 돌아왔다. 군자정(君子亭)에 차려진 빈소에서 후인들은 정중하면서도 잔치하듯 조문하였다. 그렇다. 불세출의 대장부 석주는 마침내 고향과의 약속을 그 이상으로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