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어머니’ 전현석 여사.
‘독립군의 어머니’ 전현석 여사.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수원시는 수원의 명예를 높인 세 명의 여성들을 소개했다. 모두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들이다. 김향화(1897~미상), 안점순(1928~2018), 이선경(1902~1921) 등 세 명이다.

이 가운데 ‘의기(義妓)’ 김향화 지사에 관한 글은 여러 곳에 썼다.

수원시 보도자료에는 ‘총칼 앞에서도 의로웠던 기생’이라고 했는데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 바른 말을 하기조차 힘들었던 억압의 시기, 그는 기생이라는 대우받지 못하는 신분임에도 분연히 일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몰랐을 리가 없다.

1919년 3월 29일, 독립만세 함성이 삼천리에 메아리치던 시기, 김향화 지사를 비롯한 수원예기조합 기생 30여명은 화성행궁을 허물고 지은 자혜의원과 수원경찰서 앞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외쳤다. 주모자인 김향화 지사는 경찰에 체포됐다. 심한 고문을 받았고 징역 6개월 판결을 받았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출옥한 김향화 지사는 수원으로 돌아와 이름을 ‘우순’이라고 바꾸고 지내다가 서울로 이주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고 후손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그러나 수원시가 공훈을 발굴해 서훈을 신청했고 정부는 2009년 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가족을 찾을 수 없어 표창장과 메달은 수원박물관 수원의 독립운동가 코너에 전시돼 있다.

안점순 할머니는 열네 살의 나이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3년 뒤 전쟁이 끝나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광복군의 도움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고되고 외로운 삶은 계속됐다.

피해자 지원단체 등의 설득으로 75세에 세상으로 나왔다. 일본 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UN 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해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국제노동기구 심포지엄에 참여했다. 안점순 할머니의 활동을 원동력으로 시민들은 건립기금 7000여만원을 모아 2014년 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 평화비를 세웠다. 또 2017년 3월 독일 레겐스부르크 인근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순이’라는 이름의 소녀상도 세웠다.

나는 안점순 할머니와 작은 인연이 있다. 1997년이었다. 지역 문화예술인 몇몇이 기금을 모아 ‘정신대 아픔 나누기’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김성열 연출로 극단 성의 연극과, 정수자 시인이 쓴 시 ‘도라지’가 노래로 만들어져 공연됐다.

모든 경비를 제외하고 200만원 정도가 남아 수원시에 기탁했고 심재덕 시장(작고)실에서 안점순 할머니를 초청해 직접 전달했다. 이때 안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17년이 흐른 뒤 그리고 2014년 5월 3일 수원시청앞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서 안 할머니를 다시 보았다.

이선경 열사는 ‘수원의 유관순’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세의 나이에 극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1919년 3월 만세시위에 참여해 구속됐다가 방면됐지만 조국독립의 뜻을 꺾지 않았다. 1920년 6월 서호 부근에서 박선태 등과 만나 수원 최초의 비밀결사 ‘구국민단’을 결성하고, 임원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의 간호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돕겠다는 맹세를 했지만 구국민단의 활동이 발각되고 이선경은 다시 체포됐다. 심한 고문으로 재판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지 9일 만에 순국했다. 그리고 순국 91년 만인 지난 2012년 3월1일 건국포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세분은 모두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명예의 전당에 반드시 올라야 할 인물이 더 있다. 필동 임면수 선생의 아내 전현석 여사다. 명예의 전당만이 아니라 늦었지만 시청 앞 필동 임면수 선생 옆에 동상도 함께 세워야 한다.

본보 지난 1일자 ‘김우영 광교칼럼-수원 전현석 어른을 독립군들은 어머니라고 불렀다’에서도 언급했지만 임면수 선생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 제2의 신흥무관학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무장투쟁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된 이후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1930년 12월 숨을 거뒀다.

독립군자금을 운반하던 큰아들도 동상과 독감 후유증으로 2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전현석 여사는 만주에서 객주업을 하며 매일 갓 지은 따듯한 밥을 춥고 허기진 독립군들에게 먹였다. 몇 달 묵은 냄새나고 색 바랜 빨래도 해줬다. 그래서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명예스러운 칭호가 붙었다.

1963년 허영백이 만주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들의 중언을 엮은 ‘광복 선열 고 필동 임면수 선생 약사’에 전 여사 관련내용이 있다.

“(전략)...항상 웃는 얼굴로 병을 앓은 동지들에게 음식을 가려 위로해주는가 하면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군인들을 격려하며, 총탄에 상한 병자에게는 약을 다려주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머지 않아 독립이 될 것이라고 위로하였다...(중략)...수시로 들이닥치는 별동대, 특파대 사람들의 식사를 하루저녁 대여섯 번 씩 짓다보면...(중략)...군인들이 무기를 간수해주고 해진 옷을 기워주고 젖은 감발을 일일이 만져주는 이 거짓말 같은 수고와 고생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중략)...전현석(全賢錫) 여사의 인내력과 온순한 마음씨와 예절에는 누구나 머리를 숙였고 독립의 어머니로 정평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독립운동자로 선생 댁에 잠을 안잔 이가 별로 없고, 전현석 여사의 손수 지은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어 실로 선생 댁은 독립운동가의 휴식처요, 무기 보관소요, 회의실이요, 참모실이며 보급처요, 정비실이요, 허구한 세월에 희생봉사 하시다가…(후략)”

‘독립군의 어머니’로서 누구나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전현석 여사는 남편 임면수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여 후인 1932년 세상을 떠났다. 한마디로 ‘위대한 집안’이었다.

임면수 선생에겐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러나 부인 전현석 여사와 아들 임우상 지사는 아직까지 정부의 표창이나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선 전현석 여사만이라도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길 바란다. 기왕이면 전기한 것처럼 임면수 선생 옆에 전여사의 동상도 함께 세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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