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27)] 생애의 껍질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이 란에서 「자화상」 등 두세 차례 자기성찰을 다룬 시를 살폈다. 또 그 범주에 포함될 시 소개. 중복이 되겠다고 잠시 망설이는데 문득 우리의 삶의 문제는 타인이 아니라 나, 나이며, 결국 나가 문제이고, 조율과 조섭의 대상이 아니냐는 반가운 질책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한편, 과학에선 같은 사물이라면 시공을 달리해도 같은 정체성을 지녀야 하고 그래야만 객관 진리 파악에 기여할 수 있지만, 문학에서는 같은 사물이라도 문맥과 사정에 따라 정체성이 다르고 달라야 하며 개개의 진실 구명은 역시 저마다 보편성을 머금고 기여한다. 우리 인생은 복잡 미묘하고 변덕과 차원이 교차하는 악보이며 연주자와 악기에 따라 음색도 또 달라서. 하여간 물리와 심리는 다르다... 그런데 다음 시가 이런 무미한 교과서류 담론을 잘 입증할 수 있을지 이제 필자도 독자 여러분의 한 사람이 되어 궁금하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 「밤」/오탁번

 

 이 시의 메시지 전개에서 그 발단은 직핍하고 간결하다. 첫 행,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자기 앞의 생’을 마친 고인. 화자는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며 이미 반추하고 있다. 따라서 ‘가는’ 이 ‘길’은 이 시의 주요 공간이면서도 적어도 한 생애를 한꺼번에 파지하는 화자의 시야와 호흡을 예고한다. 문학작품에서 특히 시의 언어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시어는 없어야 하고, 꼭 있어야 하는 시어만이 있어야 한다는 반복되는  오랜 주장에 적합한 사례이다. 

 화자는 그리하여 그 길을 가다가 본 밤나무 아래, 소복하게 떨어져 있는 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밤나무의 생태는 특이하다. 밤송이는 그 속에 밤을 품고 기르기에 마치 부모가 아이를 보호하고 기르는 모양과 같고, 다 자란 밤나무에서 열매가 생길 때까지 그 씨앗인 밤이 뿌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조상과 부모가 내게 어떤 헌신을 하였는지 그 이미지를 여실히 상기하게 한다. 제사상에 밤을 올리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는 그 관습성 인식만을 그대로 활용하지 않는다. 화자는 할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그렇게 연결하며 존경하는 정서를 ‘가는 길’에 투영하고 있지만,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을 확인하는, ‘밤송이를 까’는 행위를 우리는 거듭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밤송이의 수북하고 날카로운 가시와 질긴 껍질은, 악착같이 그럴듯한 자기보호 분식(粉飾)을 비유하고, 그 까기는 그것을 제거하여 실체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드디어 ‘또렷하’게 드러나는 실체. 즉, 누구나 관 뚜껑이 덮이면 주변 사람들이 그 생애를 제대로 평가하고 말며, 만약 그렇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느님’이, 하필이면 축제의 날 한가위 날에 드디어 까고야 만다는 것이다. ‘쭉정밤’(속에 알이 없는 껍질뿐인 밤송이), ‘회오리밤’(밤송이 속에 외톨로 들어앉아 있는 밤), ‘쌍동밤’(한 껍데기 속에 두 쪽이 들어 있는 밤)... 모두 껍질 속 실체의 환유들이며 해석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이 시는 겉으로는 가볍고 속으로는 무겁다. 동심(童心)이 일관 관통하고 있으면서도 성년이나 노년의 막중한 자기성찰을 보여준다. ‘한가위 보름달을/손전등 삼아/하느님도/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우리는 이 시행의 ‘하느님도’에서, 보조사 ‘도’에 병렬된 화자의 자기성찰을 놓쳐서는 안 되리라. 올해 초에 고인이 된 대가 시인이 이 시 너머에서 천진(天眞)하면서도 강정(剛正)한 미소를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