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29)]  ‘내 생의 물결무늬자국’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우리 인간은 혼자 홀로 살지 못 한다. 혼자 홀로도 산다고 해도 그저 심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여러 인연의 그물이 회로처럼 늘 현전하고 있고, 그 관계를 반추하고, 이으며 이어지며 살아간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부터 시작하여, 형제 친구는 물론 여러 지인들, 조력자와 적대자,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한 시공을 살면서 겪는 인간관계는 다양하고, 우리 삶의 질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관계도 많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일정하기가 쉽지 않다. 어제의 동지가 적이 되고, 어제의 원수가 은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서로 증오하고 시기하며, 모멸과 보복, 애정과 증오로 얽히거나 엮여있다면, 또 겉 다르고 속 다르며, 미묘한 호오의 복합과 착종, 유감과 경멸이 개재되고 혼재되어 있는 관계라면, ‘사람이 무섭다.’ 아니, 사람의 ‘마음’이 무섭다. 그래서 성인들과 현인들은 그 악착같은 난마의 난제 해결에 그만한 질량의 말씀을 남겼고, 다음 시에서 화자가 주목한 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도 있다. 그런데 화자는 이 위대한 도덕성 지혜를 회의한다.  

 

사람이 무서운 건 관계 때문이고

관계가 힘든 건 마음 때문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

한 구절 한 구절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내게로 왔다

발자취를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은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붉은 문장을 이해한 건

혹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때였다

사랑과 인식의 출발에 눈을 뜬 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문장을

지운 뒤였다

한 사람의 마음도 살리지 못 하면서

관계의 소통과 유대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닻을 내린 건

귀가 순해진 뒤였겠지

그때 비로소

나는 사람이 궁금한 사람이었고

마침내 나는 

사람이 힘든 사람이란 걸 알았다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하는 새 아침

아프지도 늙지도 말라는 연하장을 받았다

눈은 펑펑 내리는데 

처음으로 나는 눈사람처럼 하얗게 울었다

주저 없이 주저앉아 눈처럼 녹으면서

괜히 열심히 살 뻔했다고 투덜대면서

생각해보니

발자취는 내 생의 물결무늬자국   

                 - 천양희/「발자취」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가 가능하지 않다거나 옳지 않아서가 아니다. 화자는 실제 관계에서 손을 내밀었다가 여러 번 좌절하였고 그러다가 나와 상대가 내민 손이 소통과 유대의 그것이 아닐 수 있고 쉽게 믿어서도 안 된다는 유보가 필요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도 허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기대를 버려야 하며 그래야 어떤 극복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역설을 화자는 각성한 것이다. 우리는 화자의 회의와 결과에 동의하며 발몽(發蒙)을 받은 듯하다. 

 그리고 ‘사람이 궁금한 사람’ ‘사람이 힘든 사람’이란 자기인식과 더불어 우리는 화자가 수행하는 자기 마음의 ‘발자취’ 탐색을 주목하게 된다. ‘생각해보니/발자취는 내 생의 물결무늬자국’. 물결의 반복되는 상승과 하강, 그 요동과 충돌의 자국. 그 자국은 상흔(傷痕)이고 지울 수 없지만 이제 희미하다. 마음의 안정을 뜻하는 이 귀중한 치유의 자각은, 어떤 지인[위 시행의 ‘한 사람’일 수 있겠다]으로부터 받은 ‘아프지도 늙지도 말라는 연하장’이 그 계기. 사람이 어찌 아프지 않고 늙지 않을 수 있겠는가만, 그 ‘관계의 소통과 유대’의 연하장을 받고 화자는 ‘눈사람처럼 하얗게 울었다/주저 없이 주저앉아 눈처럼 녹으면서’. 필자도 화자를 따라 그렇게, 그렇게 울고 싶다. 그 행복한 울음을.  

사족 : ‘괜히 열심히 살 뻔했다고 투덜대면서’. 바로 앞 ‘눈처럼 녹으면서’란 마음의 상태를 보다 구체화하는 이 시행을 한 번 더 읽는다. 위축에서 이완으로의 전이뿐만 아니라, 서서히 밝아오는 화자 내면의 생동하는 기운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