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장 모신
무덤 안에서
생시처럼 두 분이
자비롭게 앉아 계셨다.
부모님 숨소리가 들리는
고요히 깊은 청산
벌초를 하면서도 외롭지 않았다.
제주를 천천히 드시는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가 안주를 집어주시고
나는 담뱃불을 붙여 드렸다.
간밤에는 이불이 무거워 괴롭더니
오늘 네가 짐을 벗겨 주는구나
오, 죄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 가거라, 부디 잘 살아라
집으로 돌아올 때 산 중턱에서
두 분의 손짓이
햇볕처럼 따사로왔다.
- 임병호「벌초(伐草)」 전문
한식은 설과 추석 그리고 단오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명절 중 하나이다. 동지가 지나고 105일째 되는 날로 보통은 청명과 겹치거나 그다음 날이 한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식만 잊혀진 명절이 되었다. 본래 이날은 정성스레 주과를 마련하여 성묘를 하는 명절이다. 조상의 묘가 헐었으면 봉분을 개수하고 주위에 나무도 심고 봉분에 떼를 새로 입히기도 한다. 모르긴 몰라도 식목일이 이날과 겹치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리라.
시인은 홀로 벌초를 왔다. ‘두 분의 손짓이/햇볕처럼 따사로왔다.’ 한 것으로 보아 한식 혹은 그 전후의 벌초이리라. 겨우내 봉분을 덮었던 나뭇잎들을 걷어내고 날이 풀리면서 들뜬 떼의 뿌리를 꼭꼭 다져준 다음 제주를 올린다. 아들의 정성에 감응하신 부모님의 모습이 보인다. 느긋이 제주를 받으셔서 음미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그 옆에서 다정히 안주를 챙기시는 어머니. 생전의 모습 그대로이시다. 술잔을 드신 채 담배까지 받아 피시며 아버지가 한 말씀 하신다. ‘간밤에는 이불이 무거워 괴롭더니/오늘 네가 짐을 벗겨 주는구나’ 그런데 시인은 ‘오, 죄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라고 한다.
오, 죄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임병호 시인은 그런 시인이다. 고 김대규 시인은 임병호 시인의 시를 가리켜 "임병호의 시는 일체의 설명을 거부한다. 그의 시는 울어본 사람만 골라서 다시 울린다. 그리고 마침내 울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라고 하였다. 토씨 하나까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시인과 시에 올린 최고의 상찬(賞讚)이지 싶다. 임병호 시인은 그런 시인이다.
위의 시는 1987년에 상재된 임병호 시인의 시집 『벌초(伐草)』의 표제시이다. 삼십 년도 훨씬 더 지난 이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은 연유는 그렇다. 더는 선산에 매장 허가가 안 난다는 핑계로 부모님의 봉분을 없애고 납골당에 모신 필자로서는 지난 한식에 문득 성묘갈 곳이 없음을 깨닫고 가슴이 먹먹했다. ‘울어본 사람만 골라 다시 울리는’ 시인의 시에서 ‘울지 않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였음인지 모른다.
임병호 시인의 건강이 걱정이다. 시인은 1965년에 수원에서는 최초로 전국 규모의 시동인지인 『화홍시단』을 창간하였고 1966년에는 인제는 고인이 되신 안익승 수필가, 김석희 시인과 더불어 세 분이 한국문인협회 수원지부의 문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거의 황무지에 가까웠던 수원 문단의 기틀을 다졌다. 1975년 첫 시집 『환생』을 상재한 다음 27권의 시집을 펴낸, 수원 시단의 명실상부한 어른이다. 그뿐만 아니라 1988년 경기일보 창간에 사원으로 참여하여 문화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활동한 수원 언론계의 큰 기둥 중 한 분이기도 하다. 당연히 건강하셔야 한다.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임병호 시인으로부터 시를 배웠다. 시인이 필자를 일컬을 때 쓰는 말 중 하나가 ‘저 애물단지’이다. 필자의 나이도 칠십을 바라보는 데 그 호칭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그렇게 부르시는 게 좋다. 임병호 시인이야말로 두주불사에 청탁불문인 애주가이다. 웬만한 지인들은 다 안다. 그래서 문제이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주변의 지인들이 시인께 술을 권할 때, 더 이상은 아니다 싶으면 필자가 그 술잔을 가로챈다. 감히. 참 버릇이 없다. 좀 버릇이 없으면 어떠랴. 어차피 근 오십 년 세월 애물단지인데. 형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소주 한 병 이상은 절대 안 됩니다.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에도 함께 마셔야 하는데.
한식이 지났다. 선산이 없으니 납골당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시인의 시처럼 ‘죄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