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69)] 무엇일까, '퍽!' 뒤통수를 치고 간다
'선생질'. 여러 차례 들은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읽을 때마다 기분이 언짢다. 사이비 교육자를 매도하는 취지로 야유와 폄하의 기운이 번들거리고 조롱과 증오의 기색이 고착되어 있는 이 말. 교단에 섰지만 교육자답지 않은 자들이 다행하게 감수해야 할 아주 가벼운 지탄에 불과한데, 왜 쓸데없이. 모든 분야의 권위가 무너진 듯한 요즘, 교육자라고 해서 특별히 보호받아야 할 그 무엇도 없다. 그렇다. 직업 자체에 권위가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에 권위가 있다. 그런데 이 말이 '꼰대질'처럼 함부로 발설되고 있어, 이제 후자도 의심스럽다. 교직에 종사하였거나 은퇴하였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제 거의 없는데도.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가 출현하였다고 해서 무슨 파문이 없을 것 같다.
내 생의 살 토막을 교단에 바쳤으나
세상은 ‘선생질’이라며 거들떠도 안 본다.
“나, 누구요.”하고
어디다 선뜻 내밀 이름이 없다
하릴없이 고내오름 오르기 7년에
시인 등단하고 나서 내 간판이 그럴 듯하다
「詩人 巡東 金 宗 昊」
떡하니 명함을 박고 보니
시인이란 게 너무 좋다
시 강의 한 번 받아본 적 없이
얼결에 시인이 되고서
예전처럼 성경을 읽노라니
무엇일까, ‘퍽!’ 뒤통수를 치고 간다
아,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한 시인이시다.
성경은 오직 한 분, 내 시의 스승님.
슬며시 명함을 뒤로 숨기고
만나는 사람마다 시인이 되라고 권한다
그런 시를 쓰다가 씩씩하게 갈 것이다.
- 「명함」 / 김종호
'선생질'과 교육자 경시 세태를 언급하는 첫 두 행은 3, 4행을 거쳐 5, 6행에서 시단 등단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해,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 시행 ‘그런 시를 쓰다가 씩씩하게 갈 것이다’까지, 그 수모의 여운이 배경과 정서로 지속되고 있다. 그런 세태에, 화자는 자신의 지난 교직 종사를 ‘생의 살 토막’을 ‘교단에 바쳤’다고 회고한다. 이 유감에 아니 누군들 자신의 직역에 그러지 않았던 사람 있느냐, 교직을 다른 직종보다 우위로 자부한다고 불만스러워 할 수 있겠다. ‘거들떠도 안 본다’고? 내게도 그렇다면서. 그렇다면, 성급해서 좀 문제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회사원질, 공무원질, 영업질, 청소질, 노가다질, 브로커질, 국회의원질, 장관질, 판사질’이란 말을 만들지도 않았고, 물론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사용해보지도 않았지 않나. 왜 하필 선생에게만 '선생질'인가. 혹 다른 건 몰라도 교육자의 위선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충정에서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의문도 그저 경시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화자의 유감은 그런 심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5행 ‘하릴없이’ 전후에서 표출되고 있듯, 퇴직 이후에 전직 교육자 명함을 만들거나 건네기를 마다하는 자기비하의 심정도 있다. 부박한 세태에 퇴축된 자의식의 처세이며, 자신과 세태를 부정하며 풍자하는 뜻도 있다. 화자는 이런 세속을 떠나듯 ‘고내 오름[달팽이 산]’에 오르고, 7년 후에 시인이 된다.
필자는 처음에 '하릴없이 고내오름 오르기 7년에'를, '하릴없이 고내오름 오르기 7년 전에'로 옮겼다가 화들짝 놀라며 바로 잡았다. 오자도 오자지만 후자라면 원래 없던 은근한 자벌(自伐)이 덧칠된다고 할 수 있고, 전자에는 입산 이후 수다한 정신의 편력이 사실 그대로 겸손하게 함축되어 있어서 그렇다. 문맥에서도 그렇고 사리에서도 전자가 적절. 하마터면 무고한 화자를 또 유감스럽게 할 뻔 했다. 전직 교육자는 산에 올라 『성경』을 읽었다. 그러다가 시인이 되었다. 말씀뿐만 아니라 이야기와 비유가 멋지고 진솔한 『성경』을 통독했다면, 시강의? 그 수강이 대체 뭐란 말인가. 화자는 ‘얼결에 시인'이 된 것도 아니다. 수업에 수업을 거쳐 온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건 애초에 시인이 되기 위해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었고, 또 결국 그렇게 되었어도 그렇게 말하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시의 마지막 세 행 ‘슬며시 (시인) 명함을 뒤로 숨기고/만나는 사람마다 시인이 되라고 권한다/그런 시를 쓰다가 씩씩하게 갈 것이다’에서, 드디어 우리도 듣고야 만다. '‘퍽!' 뒤통수를 치고’가는 소리를.
이윽고, 독자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고 싶다. 화자가 권유하는 ‘시인’이 어떤 시인인지, 또 ‘그런 시’가 어떤 시인지...
사족 : ‘그런 시를 쓰다가 씩씩하게 갈 것이다’에는 세속의 치기와 사멸을 초탈할 용감한 정각의 진정성과 불퇴전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넘친다. 우리가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오 하나님이 오랜만에 대장부를 만드셨구나.” 대학 재학 시절, 구상(1919-2004) 선생이 강의 도중에, “시는 대장부의 사업이다.”[‘대장부’는 큰 뜻을 품은 사람이란 뜻이기에 남녀불문]고 하였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어째서 그런지 알 듯 말듯 늘 미욱하게 의아해 해왔는데, 비로소 오늘 필자는 길었던 의문을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