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70)] ‘눈을 감아도 잘 보이는 먼 곳’
터널에 들게 되면 우리는 미리 알았어도 좀 긴장하며, 어두침침한 폐쇄성 공간을 지나가며 답답해하다가, 바깥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과 산하를 떠올리고 조급해한다. 게다가 달리고 달려도 저 멀리서나마 작게나마 출구의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이라면, 우리는 공포와 유사한 불안 심경이 점점 짙어지면서 당황하게 되고 그저 빨리 터널을 벗어나기를 바란다.
긴 터널에 교차로가 있다
수시로 생각을 바꾸는 신호등이 있다
처음 본 낯선 문자로 고백했으나
너는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쇳덩이 같은 사실인데
꿈꾸었느냐고 묻는다
마치 꿈이 죄가 되는 양 너의 웃음이 쟁반처럼 커다래진다
눈을 감아도 잘 보이는 먼 곳은
한 장의 우편엽서로 남고
몸속에 까마귀 짓는 소리가 가득해진다
바람처럼 오가는 꿈 밖에서 세계가 어두워진다
터널 안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렸다고 다시 말한다
무슨 좌회전이냐고
터널에서는 직진, 직진이라고 소리친다
허깨비가 된 내 겨드랑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나를 닫고 오답처럼 조용해졌다
뒤에 줄지어 선 차량들이 클랙션을 눌러댔다
여러 발의 총을 맞은 듯 몸에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렸다
한 달 전 내 안에 들어온 노르웨이가 구멍으로 술술 빠져나갔다
서둘러 먼 곳을 현상한 잘못이 컸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죽은 신호등처럼
좌회전, 우회전이 없는 밤이 왔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 「먼 곳」/홍일표
우리가 운전 중에 가끔 봉착하는 ‘터널’은 문제 장소뿐만 아니라 문제 시간에까지 두루 활용하는 일상성 환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는 아무래도 1, 2, 3, 4연은 화자가 터널 내부의 정황을 차용한 알레고리이고, 5연은 그 알레고리를 자아내는 원천, 즉 화자가 직면한 현실 상황이다. 독자마다 취지들을 달리 새길 수 있겠는데, 필자는 현재 우리 사회의 진영 대립과 갈등과 추이를 짐짓,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문제시하는 메시지를 읽는다.
첫 두 행 ‘긴 터널에 교차로가 있’고, 교차로에 ‘수시로 생각을 바꾸는 신호등이 있다’는 화자의 진술에는, ‘긴 터널’이 야기하는 문제와 터널 안의 위축 정서뿐만 아니라, 그 대책이 동시에 제시되어 있다. 뒤에서 이 진술은 오히려 유감을 확대하는 단서가 되지만 해결 대책, 즉 모색이 가능한 출구도 이미 가까이 있다는 시사.
그런데 처음부터 화자와 화자의 상대는 소통이 꼬인다. 화자는 상대에게 ‘고백’같이 진지하게 출로 의견을 제안하지만 그 언어는 공유의 언어가 아니라, ‘처음 본 낯선 문자’. 3연에서 알 수 있듯, 안 그래도 오직 직진, 중단 없는 과감한 전진 주행이야말로 ‘긴 터널’을 벗어나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문자로 ‘고백’하다니. 그래서 상대는 ‘꿈’ 꾸느냐고 힐난하듯 반문하고, 막막한 불통에 화자는 ‘몸속에 까마귀 짓는 소리가 가득해’지고, ‘바람처럼 오가는 꿈 밖에서 세계가 어두워진다.’
이 단절은 확대된다. 화자는 그래도 ‘좌회전 신호를 기다렸다’고 하자, 상대는 역시 의아해 하고, 상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뒤에 줄지어 선 차량들이’ ‘직진, 직진’이라 외치며, ‘클랙슨을 눌러댔다.’ 이 기세에 더욱, 화자에게 한 달 전부터 ‘눈을 감아도 잘 보이는 먼 곳은/한 장의 우편엽서로 남’는다. 아마 ‘먼 곳’ 그 곳은 ‘긴 터널’을 벗어나 차량 행렬이 도달하면 좋을 곳, 좌회전해도 가능하고 우회전해도 가능하지만 좌회전하면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겠다는 터널 바깥 ‘광장(廣場)’인데, 협의하고 합의하지 못해 ‘눈을 감아도 잘 보이’지만 멀고 먼 터널 여로를 함축한 ‘우편엽서’에 불과하다. 화자의 몸에서 ‘술술 빠져나가는’ ‘노르웨이’는 그 ‘먼 곳’이며, ‘먼 곳’의 환유이기도 하다. 왜 북구의 노르웨이를 화자가 대안으로 여기는지 그 구체를 알 수 없지만, 입헌군주제에 여러 당이 연립내각을 잘 꾸려 운영하고 국회가 부속기관으로 노벨평화상위원회를 두고 선정과 시상을 주관하게 하는 나라의 면모와 관련되는 듯하다.
화자는 좌로나 우로 방향을 전환하면 ‘긴 터널’을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곧 만날 수 있다고 거듭 안타까워하면서, 오직 전진하며 ‘생각을 바꾸지 않는’ ‘신호등’은 ‘수시로 생각을 바꾸는’ 살아있는 ‘신호등’과 대비되는 ’죽은 신호등’이라고 질타한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죽은 신호등’은 현실 상황의 환유인 ‘좌회전, 우회전이 없는 밤’의 직유이면서, 전환을 거부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전진만하는, 자신의 고집에 매몰된 직진론자들을 지척하는 암유(暗喩)일 것이다.
사족 : 화자는 ‘낯선 문자’ 운운하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였는데, 시도를 거듭해도 상대에게 자신의 제안이 수용되지 않아 그렇게 에둘러 표현한 것일 것이다. 화자의 자책이 토로된 부분은 4연 4행 ‘서둘러 먼 곳을 현상한 잘못이 컸다’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지 않는 주변의 고착에 투척하는 혐의가 그 이상으로 크다. 그리고 이 시에서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좌회전, 우회전이 없는 밤’으로 현실 상황이 형상화되는데, 공감할 독자가 적지 않겠지만 독자 모두가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화자와 같이 방향 전환을 제기한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많이 있어 왔고, 지금도 그 충정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 이 시를 필자처럼 읽는다고 하더라도 이 시의 ‘직진’, ‘좌회전’, ‘우회전’을 기존의 함축대로 평이하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진’ 세력은 두 진영의 일부 타협 없는 일방 집착 세력이겠고, ‘좌회전’ ‘우회전’은 유학의 개념을 차용한다면 ‘시중(時中)’ ‘중용(中庸)’, 그 지향들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