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71)] ‘「유빙(流氷)」’ : ‘외롭기는커녕 즐거웠어’
이 미니 픽션은 어느 글쓰기 교실의 이야기를 한다. 수강생들은 대체로 60세는 넘긴 인사들인 듯. 그들은 노약과 한가의 이미지가 아니라, 인생의 부조리로 꼬인 국면들의 곡절과 세계의 비린내 나는 골목들의 정황도 체험으로도 상당히 알고, 여러 이상한 인간성과 여러 착종(錯綜) 정서에도 꽤 익숙한 사람이며, 지난 역정을 그저 회억이 아니라 쓰기 관련 사고로 통찰하고 그 의미나 의의를 끝내 확인하고 싶은 지향을 실천하는 강건한 휴머니스트들 이미지. 그 가운데에 대학 시절 ‘연극반’에서 만나 연애하였고, 헤어졌고, 오십년 만에 조우하게 된 미준과 주연도 있었다.
진행 중인 강좌였지만 미준과 주연에게는 첫 수강 첫 장면. 수강생들이 영상을 시청하는데, 영상의 내용을 전지 시점 화자가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목소리가 등장한다.
‘던져!’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여행객들에게 지시했다.
‘던져, 빨리 던져!’
북극 빙하로 떠난 여행객들이 서로 눈치 보며 망설이다가 포효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다들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던졌다. 최고의 셰프인 봉식은 언제 가져왔는지 고급 식기구들과 음식에 쓰려고 모아 놓았던 식자재들을 바다를 향해 힘껏 던졌다. 넓은 딸기 농장 주인은 정성스레 키웠던 딸기들을 박스째 던져 버렸다. 젊은 날 유명해진 소설가는 계속 책을 내야한다는 부담으로 사무실에 갇혀서 수십 권의 책을 냈지만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자 여든의 굽은 몸으로 한 권, 한 권 책을 내던졌다.
- 「유빙」/윤신숙
북극 바다에서 막 유빙을 구경하는 선상(船上) 여행객들에게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괴기스럽기도 하고 어딘가 진지하기도 한 명령조의 그 말. 여행객들의 과감하고 신들린 듯한 투척은 그 목소리의 주체가 여행객에게 큰 권위가 있어 종속 발생한 승복 행위만은 아닐 것이다. 승객들에게 이 여행은 아마 생애를 정리하는 마지막 여행인 것 같고, 이미 그 무엇을 위하여 그 무엇도 버릴 의사를 지니고 있어 그런 방기가 가능하였을 것 같다. 하필이면 ‘북극 빙하로 떠’나, 드디어 그 ‘유빙’을 조우한 여행객들’이 아닌가.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이래, 빙하의 빙산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등이 발견하고 프로이트가 명명한 ‘의식되지 않는 의식’을 포함하여 인간의 중층 의식 전체를 비유하는 매체로 활용되어 왔다. 바다 위 빙산은 빙산의 전부가 아니며 전체 빙산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고, ‘의식되는 의식’의 비유이며, 바다 아래 잠겨 있는 빙산의 대부분은 ‘의식되지 않는 의식’, 즉 무의식의 비유이다. 아무래도 이 여행객들의 빙하 여행은, 트라우마와 수상한 욕망, 게다가 자신이 상기하지 못하게 봉쇄하고 봉쇄한 지난 수모와 비리를 포함하며, 자신의 행동과 특히 무언가 ‘변형된 의식’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한 ‘무의식’, 그 ‘무의식’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필생의 작업에 해당하고, 괴기스럽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한 그 선동조의 목소리는 바로 고백하려는 그 무의식의 발화처럼 여겨진다.
더욱이 여행객들이 버리는 물건들도 저마다 심상치 않다. 떼려 하여도 떼기 지난한 애착의 대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봉식이 버린 ‘식기구’와 ‘식재료’는 그가 직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차마 버릴 수 없는 삶의 도구들이고, 딸기 농장 주인이 버리는 ‘딸기’는 자신의 심장으로 보이며, ‘젊은 날 유명해진 소설가’가 이후 자신의 팔리지 않는 소설책을 버리는 것은 거의 자살과 유사한 허무로의 퇴각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 상황을 같이 하는 동승한 승객들이 이어 버리는 그 무엇은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삼십대 남녀 싱글들은 자기들이 만든 가상의 집을 지체 없이 내던졌다. 마약 중독자들은 마약에 취한 채 돈다발을 내던졌다. 젊은 부부들은 꽃바구니에 넣은 아기들을 몰래 물 위에 띄우고 사라졌다. 너도 나도 던질 준비하던 사람들이 아기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멈췄다.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여행객들은 양조장 사장이 버리려던 술을 퍼마시며 쓰러졌다.
삼십대 남녀가 ‘가상의 집’을 버린다는 것은 오늘 이 땅의 사정을 고려하면, 결혼과 미래 주거 공간뿐만 아니라 계층 상승 욕망을 포기하는 행위이고, ‘마약 중독자들’이 ‘돈다발’을 버리는 것은 마약에 취한 채나마 자신과 마약을 한꺼번에 절멸하는 극단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객들의 투척이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우리의 뼈에 새겨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러한 도저한 행위들은 ‘젊은 부부들’이 자신의 ‘아기들’을 ‘몰래 물 위에 띄우고 사라’지는 모습에서 절정에 도달하고 우리는 공포에 감전된다. 한편 동정에도 감전된다. 젊은 부부들’은 ‘아기들’을 그래도 바다에 던지지 않고 ‘띄’웠으며, 그 ‘아기들’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돌아서서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처참한 정경에 드디어 너 나 할 것 없이 승객들은 모두 ‘양조장 사장이 버리려던 술을 퍼마시며 쓰러졌다.’ 양조장 사장도 물론.
‘꽃바구니’를 타고 빙하를 떠도는 ‘아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황이 없지만 우리도 상상력을 펼쳐 우리에게 제안하자. ‘젊은 부부들’의 자신에게도 잔인무도한 그 행위는 그저 자신의 ‘아기들’에게 희락은 물론 비애도 겪게 할 자신의 무모한 애착을 버리는 결심으로 이해하면 좋겠다고. 그리고 전지 시점의 목소리가 묘사하는 이 상황 전체를 우리는 환유 중심의 현애살수(懸崖撒水) 알레고리로 접근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 목소리의 상황 묘사가 끝나고, 제2의 전지 시점 화자가 등장하여 독자들에게 그 글쓰기 교실의 후속 상황을 묘사하며 연출한다. 주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는데, 감을 잡은 것 같아.” 미준도 우선 듣기에 다르지만 본질이 같은 소감을 피력한다. “그토록 숨기고 싶던 비루한 과거들이 그다지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았어. 지나고 나니 새로운 열매를 맺듯 부끄럼 없는 글을 쓸 것 같아.” 즉 글쓰기에서 우선인 쓸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란 걸 알았으며, 그간 숨기고 숨겼던 자신의 비참한 과거도 그 일종이란 정직하고 진솔한 자각이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수강생의 “작가에게 대필하든가 본인이 쓴 자서전을 주는데 지루해서 읽기가 싫더라고요. 힘들고 슬펐던 대부분 우리들의 공통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공감은커녕 거부감이 들더라고요”란 발언으로 추인되며, 어떤 수강생이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쓰면 말과 달리 ‘응어리진 마음’이 해소되는지 묻자, 선생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서 말할 때와는 달리 ‘자기도 몰랐던 마음 깊이 숨어 있던 어떤 것을 만나게 될 거’라고 하고, 그것은 ‘아름다움’이라고 하며, 또 ‘그 또한’ ‘희로애락’처럼 ‘순간’이라고 첨언하고야 만다. 드디어 주연과 미준은 선생의 제안에서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의 ‘2인 자서전’ 쓰기를 결심한다.
이 미니 픽션의 결말은, 두 사람이 수강하기 이전에 이 강좌의 수강생이었으며 고인이 된 이말분 회원이 강의실에 입실하며 전날 동료들에게는 귀에 익은 목소리로 건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갑자기 죽은 나 때문에 걱정들 많이 했을 텐데 … 몸은 툭 떨어져 나갔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 마치 거대한 빙산이 조각나면서 여러 유빙이 에메랄드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아 외롭기는커녕 즐거웠어. 어디선가 성가가 울리고 나를 인도하는 합창을 들으며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어.”
사족 : 이말분 여사의 말 중, ‘거대한 빙산’은 다시 말해 ‘의식’과 ‘무의식’의 막심막강한 합체이고, 그 ‘조각’난 산산(散散)은 그 폭발 파쇄 모습, 그리하여 영혼이 후련하게 누리는 대 자유 상태이고, ‘성가’와 ‘합창’은 그 안식과 평화의 부연일 것이다. 이 글쓰기의 의의는 다시 생각하니, 소설가나 시인들도 경청해야 할 글쓰기 강의록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