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76)] ‘다 같이 웃었던/오후’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큰 업적이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인문 분야에서도 젊은 시절에 이뤄지는 사례가 많다. 그런데 그 시절 그 업적은 노력보다 타고난 천품에 의거하는 것 같아 우리는 찬탄하면서도 예외로 여겨 좀 경원하는 듯하고, 정년 이후나 노년에 이룬 업적은 재능보다는 의지와 노력에 기인한다고 여기며 부러워하면서도 대리만족을 느끼는 듯하다. 그렇다. 노년의 역구(力救), 아니 그 시기의 보기 드문 고양(高揚), ‘자신에의 충서(忠恕)’, 이는 주변 인간의 품격까지 높이면서 사람들을 더 감동시킨다. 이행 의사가 없어도 무언의 격려로 알고 심지어 위로로도 삼는다. 91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98세 2009년에 자신의 장례비로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간하였던 시바타 도요(1911–2013) 여사, 그의 시는 다시 읽어볼 만 하다. 오늘날 즐비한 80, 90대 이상의 독자들이, 또 젊은 독자들도.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 주었지

 

그랬더니

햇살까지 따라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

나는 대답했네

 

그만 고집부리고

편히 가자는 말에

 

다 같이 웃었던

오후

       - 「바람과 햇살과 나」/시바타 도요(1911-2013)/채숙향 번역

 

 ‘바람’과 ‘햇살’의 내방, 그리하여 대상으로 의식된 ‘바람’과 ‘햇살’, 그 상태만으로도 좋은데 소녀 소년으로 의인화되어 ‘나’에게 말을 걸어 더 좋다. 대화는 동시(童詩) 풍격 진술로 친근하다. ‘바람’과 ‘햇살’이 ‘나’에게 던진,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란 질문은 우선 듣기엔 하나마나하지만, 혼자 지내는 ‘할머니’의 처지를 동정하고 공감한 나머지 그 정리가 그렇게 표출된 것일 것이며, ‘나’ 역시 모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응, 좀 그래. 그렇기는 하지만 뭐 견딜 수는 있어’라고 대답하지 않고, ‘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라고 다소 볼멘 조로, 뭘 그렇게 물어보냐는 반문 어조 비슷하게 대답한 듯하다. 그러자 ‘바람’과 ‘햇살’도 짐짓 역습하듯, 그래 그러니까 ‘그만 고집부리고/편히 가자’고 한다. ‘고집’이라고? ‘편히 가자’고?  

 농담 같은 진담 같으며 과람한 결례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덧 어렴풋이 추정한다. 이 말은 사실 ‘나’의 심중에 있는 말이 아닐까. 나아가 작중 문답이 ‘나’의 자문자답 독백이 아닐까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다 같이 웃었던/오후’란 결말에 우리는 다정하고  짓궂은 개구쟁이 ‘바람’과 ‘햇살’과 ‘할머니’를 따라 문득 웃는다. 그러면서 특히 ‘할머니’의 깔깔 웃는 얼굴에서, ‘할머니’가 한 말, ‘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란 너무 쓸쓸했던 말이 어느새 흔적조차 없다는 걸 본다. 우리 가슴에 설핏 들어박혔던 그 말. 한 편 더 읽자.   

 

나이를 먹을 때마다

여러 가지 것들을

잊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사람 이름

여러 단어

수많은 추억

 

그걸 외롭다고 

여기지 않게 된 건

왜일까

 

잊어가는 것의 행복

잊어 가는 것에 대한 

포기

 

매미 소리가

들려오네

             - 「잊는다는 것」

 

 ‘나이를 먹을 때마다’ 특히 ‘사람 이름’을 잊는다니, 참 자신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롭다고/여기지 않’는다. 그것 또한 자연이 선사한 행복으로 알며, 또 미련 없이 ‘포기’한다. 그 대신 잘 듣는다. ‘매미 소리’. 느닷없이 들려오는 그 합창은 이전에 듣던 소리가 아닐 것이며, 경청할수록 그 뜻도 느낌도 깊고 넓게 다를 것이다. 

 사족 : 그렇다면 앞 시에서 ‘바람’과 ‘햇살’이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라고 물었을 때, 왜 ‘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라고 할 수 있었는지 그 또 하나의 까닭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