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시림동인’들 “더 늦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봅시다”

김우영 논설실장 / 시인

대구에 사는 이정환 시인이 주소를 물어보더니 소포를 보내왔다.

내용물은 이정환 시조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였다. 지금까지 펴낸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한권으로 묶은 시집을 보면서 내심 질렸다.

등단 이후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발표한 작품 1019편이 실렸다. 따라서 11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전집에는 그동안 이정환 시인이 펴낸 시조집 12권과 동시조집 2권이 들어있다.

그의 시를 읽은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사물의 구체성에서 정서의 은미(隱微)한 결을 유추하여 그것을 일관된 사랑의 테마로 착근시켜온 미학적 표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초록’이라는 시는 이 시조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879쪽에 실려 있다.

때마침 신록도 지나 이제 산천이 짙은 초록의 여름으로 접어드는 때라서 이 시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초록

이정환

석 달 열흘 동안 속 깊이 잉태했다가

대지 위로 뿜어 올린 겨울은 잠적해도

초록은 어머니 품을 잊지 않을 것이다

무성히 우거지면서 숲을 이룬 온 누리

내리쬐는 볕살 속으로 숨 쉬는 이파리들

초록은 돌아갈 날짜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정환 시조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에서

 

‘석 달 열흘’간의 겨울이 잠적했어도 초록은 겨울인 ‘어머니의 품’을 잊지 않는단다. 보통은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승리자처럼 초록이 등장한다고 하지 않나? 겨울은 타도의 대상이라서 인내, 또 인내해 버텨내야 봄이 오고 산천초목 무성한 여름을 맞이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인은 겨울을 잊지 않는다. 겨울이 있어서 ‘무성히 우거지면서 숲을 이룬 온 누리’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뿐 만 아니다. ‘내리쬐는 볕살 속으로 숨 쉬는 이파리들/초록은 돌아갈 날짜 잊지 않을 것이다’라며 다시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시인이 이 시를 몇 살 때 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나 나나 이제 초록의 잎사귀는 아니다. 그 계절을 다 지나 초록빛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그렇다. 돌아갈 날짜를 생각해야 하는 나이다. 이 한 여름에 겨울을 잊지 말아야하는 것이다.

시인 문태준은 지난 2020년 8월 12일자 불교신문에 이 시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썼으니 함께 보는 것도 좋겠다.

‘봄은 겨울로부터 태어난다. 봄은 겨울의 그 내부에 생겨 자라난다. 모든 신생의 생명은 어머니가 있다. 모태(母胎)의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은 없다. 어머니의 품이 있어 신생의 생명이 이 세상으로 오고, 와서 자라고, 일가(一家)를 이룬다. 일가를 이룰수록 어머니라는 그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커진다.’

이정환 시인과는 ‘시림(詩林)’ 동인으로 만났다. 모두들 파릇파릇하던 1970년대 중반 그때 우리들은 아직 문단에 등단하기 전, ‘문청’이었다. 수원의 나와 대구의 이정환·박기섭, 부산의 최영철·조성래, 광주의 김미구, 안동의 김승종, 대전의 최봉섭, 전남 순천의 김기홍·김해화, 서울 문창갑, 제주 오승철 시인 등이 동인이었다.

이들 가운데 시조를 쓰는 이정환, 오승철, 박기섭 시인은 한국 시조문학계를 대표하는 중진시인으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나의 동갑내기 친구 오승철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나 우리들을 슬프게 했다. 그의 영결식에서 이정환 시인은 조시를 읽었고, 나는 그를 추모하는 칼럼을 써서 발표했다.

2019년 수원에서 번개모임으로 만난 시림동인들. 뒷줄 왼쪽부터 김우영, 문창갑, 오승철, 최영철, 한사람 건너 김승종. 아랫줄 왼쪽 김미구, 최영철 부인 소설가 조명숙. 이들 중 오승철 시인은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사진=김우영)
2019년 수원에서 번개모임으로 만난 시림동인들. 뒷줄 왼쪽부터 김우영, 문창갑, 오승철, 최영철, 한사람 건너 김승종. 아랫줄 왼쪽 김미구, 최영철 부인 소설가 조명숙. 이들 중 오승철 시인은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사진=김우영)

이정환 시인은 수원에도 자주 왔다. 나는 물론 임병호 시인과도 어울려 막걸리를 마셨다. 그때 임병호 시인으로부터 ‘토향(土鄕)’이란 호도 얻었다.

 

천구백 칠십 육년 늦은 가을 하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일원

따가운 햇살 받으며 화성에 올랐다

 

낮술에 불콰해진 임병호 김우영 시인

수원의 문우와 처음으로 어깨 곁고

정조를 생각하면서 화성에 올랐다

 

화서문 서포루 서이치 서장대

북포루 장안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외적을 방어할 보루 화성에 올랐다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아름다움이 적을 이겨 내느니라, 답한

정조의 예지로 빛난 화성에 올랐다

 

아름다움이 기를 꺾는다는 것을 안 임금

임병호 김우영 이정환 시인의 기를 꺾는

천구백 칠십 육년 늦가을 화성에 올랐다

                               -이정환 「화성에 올랐다」

 

그때를 회상하며 쓴 시란다. 1976년이니 무려 48년 전이다. 팔달산 중턱에서 한잔하고 사진도 찍었다. 이 시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정환시인은 참 정이 많은 사람이다. 어깨동무하고 ‘무성히 우거지면서 숲을 이룬 온 누리’ ‘화서문 서포루 서이치 서장대 북포루 장안문 화홍문 방화수류정’을 걷고 싶은 사람이다.

최근에 만난 것은 지난해다. 수원에서 열린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세미나에서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밤늦도록 얘기를 나눴다. 나혜석 거리 단골 생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겨 추억에 젖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오승철 시인과의 인연을 떠 올리면서 둘 다 먹먹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아프지 말자, 오래도록 살자,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자주 만나자...’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끼리 다짐도 했다.

며칠 전 이정환 시인에게 전화를 했다. 살아있는 사람들끼리라도 만나자고...

이어서 요즘 눈이 자꾸 흐려지고 있다는 부산의 최영철 시인, 일산의 문창갑 시인, 구례의 김해화 시인, 분당의 김승종 시인, 평택의 김미구 시인에게도 일일이 전화했다.

모두 온단다. 7월 12일 낮 12시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조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에 실린 시 ‘초록’에서 그가 한 말처럼 돌아갈 날짜는 잊지 않겠지만 그 때까지 이승에서 자주 만나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