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78)]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생성과 소멸도 만물의 이치이자 운명이고 세속의 모든 인연 또한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인(故人) 생전에 없던 인연이 발생하고 뜻있다면 역시 소중하다고 하겠다. 지난 6월 18일(화) 오전부터 김영랑(1903-1950) 선생의 재 이장(망우리 묘소⟶천주교용인추모묘원. 천주교용인추모묘원⟶망우리역사문화공원)이 시작되었는데, 그 현장에 참가하여 선생의 유해를 뵈었고, 이동할 때 유해 상자를 안은 대학동기 정종배 시인의 권유로 1950년 2월에 망우리에서 찍힌 선생의 존영을 영정으로 모시고 걸었다. 선생은 아시다시피 우리 민족정서의 서정 수준과 영역을 대거 확장한 1930년 『시문학』의 동인(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이하윤 등) 중 한 분이고,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1934)이 아주 유명하다. 그날 묘를 열기 전에 막내딸 김애란(80) 여사를 위시하여 일동이 고유제를 치렀는데, 홍성례 시인이 그 시를 낭독하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수능에도 출제되었고 세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설이 자세한 이 시에 더 추가할 것이 별로 없겠지만, 이번에 다시 듣고 읽으면서 화자가 진술하는 현재 이외에 제시된 시간을 중심으로 그 취지를 주목하게 되었다. 

 먼저 1-4행에서 제기된 시간은 진정성과 필연성 어린 인내로 기대하는 미래의 시간이며, 화자는 ‘나의 봄’은 3-5월이 아니라 오직 4-5월 중에서도 모란이 피어 있는 시기만이라고 강조한다. 봄이 와도 화자에게는 봄날이 아니다. 모란이 져도 봄날이 아니다. 봄은 오직 모란이 핀 기간. 이 유례없는 강조는 피어 있는 ‘모란’의 상태를 소중하게 절대화하기에 기여한다. 나아가 모란이 지면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라고 하여, 한 해 네 계절을 그저 모란이 핀 봄과 모란이 부재하는 시기 둘로만 이분하여 대비하고, 자신의 심정도 ‘보람’과 ‘설움’으로 대조한다. 그런데, ‘잠길 테요’에서 알 수 있듯, 이 피력은 어디까지나 피동이 아니라 화자의 의지가 작용한 능동의 소산이다. 화자의 이런 자기현시는 아마 자신도 의식하고 있는, 일반과 다른 파격이다. 이 비범한 양상이 이 시 매력의 기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10행에서 제기된 시간은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두 시간이 한꺼번에 중첩되어 있다.  즉 5-10행의 진술에서 우리는, 특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란 생각과 행태가, 1-4행의 예정된 미래 시간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현재 이전 과거 시간에도 이미 발현되었던 생각과 행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1-4행의 토로를 읽을 때는 이 토로가 앞으로 닥칠 예정으로만 알았는데, 5-10행을 읽으면서는 그뿐만 아니라 현재 이전 과거에서부터 이미 해마다 거듭되어온 반복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는 5-10행 진술의 자의식에서 이 시의 독특한 시간 구조와 화자와 시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 시의 또 하나의 특성으로 음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란 이미지와 분리될 수 없는 이 순환을, 그 연쇄를 화자는 그저 무연히 탄식하기만 하는 것인가. 

 11-12행에서 제기된 시간은 1-4행에서 등장한 그 미래 시간이며 그 연장이다. 현재 그러고 있지만 더 인내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면 도래할 ‘나의 봄’ 시간이다. 물론 그 시간은 아무리 감내한다고 하더라도 지루하게 기다린 긴긴 ‘삼백예순 날’과 정성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다. 닷새. 이 유감에 우리는 적극 공감하면서도 12행의 부사 ‘아직’을 우선 서둘러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의미의 파장이 크다. ‘어떤 일이나 상태 또는 어떻게 되기까지 시간이 더 지나야 함을 나타내거나, 어떤 일이나 상태가 끝나지 아니하고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아직’과 이 ‘아직’이 수식하는 ‘기둘리고 있을 테요’를 읽으면서 우리는, 화자가 ‘모란’이 피기에는 시일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과거의 경험으로 넉넉히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란이 필 때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겠다는 의지를 견지하는 모습을 상기할 수 있다. 

 나아가 11, 12행의 의지가 이미 1, 2행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에서 표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시인의 관련 의도를 다시 헤아릴 수 있고, 네 시행이 이 시의 메시지와 전체 리듬을 수미(首尾)에서 고양하고 있다는 미학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화자의 이 태도는 6행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와 12행 ‘찬란한 슬픔의 봄’과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의 화자가 감상(感傷)에 빠져있다고 여기지 않고, 우리 또한 그렇지 않다고 자각하는데, 그 이유가, 화자의 그 의연한 의지와, 그리고 그 원천에 ‘희망’이 존재하며 그 실현이 가능하다고 은연 감지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처음 1-4행을 읽으며 못내 의아하였고 거리를 두기도 하였던 화자의 ‘모란’과 ‘나의 봄’, 그리고 그 비상하고 특별한 심정에, 우리가 이윽고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 시의 결구, ‘찬란한 슬픔의 봄’은 그 자체는 형용모순 역설이지만, ‘모란’이 피어 있는 ‘나의 봄’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사실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1, 12행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과 3, 4행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는 이 시의 대강이며, 두 시행의 ‘아직’과 ‘비로소’[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 전까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던 사건이나 사태가 이루어지거나 변화하기 시작함]는 서로 대조될 뿐만 아니라, 이 시의 시간 구조 심화와 독자들의 그 음미에서 도저히 생략할 수 없는 시간 부사이다.  

 이어서 영랑 선생이 1939년 11월 『문장』에 발표한 「독을 차고」를 읽어보자.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이 시에서도 화자는, ‘허무’를 문제시하기는 하지만 ‘허무’에 매몰되거나 그치지 않는다. 이미 가슴에 ‘독’을 찬지 오래인 화자에게 한 벗이 은근히 말리자 화자는 거절한다. 세상과 삶에 하루도 ‘원망’하지 않은 날이 없었기에, 허무라, 그렇군, 허무하다면 허무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에게 ‘내 산 채’로 ‘찢기우고 할퀴우’더라도 ‘내 외로운 혼’을 지키기 위해,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화자의 이 태도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화자의 태도와 비슷하기도 하다. 의연한 의지와 유연한 위의가.     

 사족 :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과 ‘나의 봄’은 말뜻 그대로 일 수도 있고, 상징일 수도 있겠다. 탐미 관점의 접근을 포함, 독자 여러분의 그 어떤 연상과 해석도 모두 좋을 것이다. 그런데 「독을 차고」에서는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가 아무래도,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태평양 전쟁(1941년 발발)을 준비하던 1939년에, 식민지 조선 전체를 전쟁에 총동원하려는 황민화(皇民化) 정책의 하나로 창씨개명을 강행하던 일제(日帝)를 가리키는 환유이기 쉽다. 영랑 선생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