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12)] 신향순 '서랍장'

김준기 시인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서랍장

장대비가 서랍장을 후려치고 있다

손때 묻은 흔적이 속절없이 젖고 있다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쓰레기장 한편에서

고단했던 입이 반쯤 풀어졌다

기쁨에 들뜨던 첫째 칸

슬픔에 밀어 넣던 둘째 칸

장대비만 그득 채우고 있다

누군가 손때 묻은 시간을

이곳에 버려두고 갔을까

크레파스 낙서

이사 다니며 모서리에 찍혔던 흔적

여기저기 흠집이 초라하다

이제 폐기장으로 가야 할

저 젖은 뼈

빈 서랍장에는

그가 품었던 좋은 추억만 담겨 있다

                                신향순 –서랍장- 전문

 

 마샬 맥루한은 “지구라는 우주선에 승객은 없다. 우리는 모두 승무원이다”라고 했다던가.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지구라는 이 우주선에 타고 있는 모두가 책임을 지녀야 한다는 말일 게다. 나는 환경운동가는 못 된다. 그래도 이 말에는 깊이 공감한다. 더 이상 소비가 미덕이 아니다. 그런데도 생산과 연관된 강합 흡입력의 고리로 소비는 여전히 왕성하게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버려지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버려진 것들은 모두 슬프다. 버려진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들의 가슴도 먹먹할 때가 있다.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서랍장 하나가 시인의 눈에 들어온다.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서랍장/장대비가 서랍장을 후려치고 있다/손때 묻은 흔적이 속절없이 젖고 있다/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쓰레기장 한편에서/고단했던 입이 반쯤 풀어졌다’ 

하필이면 버려진 서랍장이 장대비에 젖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폐기물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서랍에는 ‘기쁨에 들뜨던’ 칸과 ‘슬픔에 밀어 넣던’ 칸들이 있다. 우리네 삶이 그러한 것이 아닌가. 다형 김현승이 ‘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에 다다른’이라고 노래했듯이 고난과 영광의 순간들이 이어짐으로 비로소 안심입명의 마른 나뭇가지에 다다르는 것이 아닌가. 그 시간들이 담겼던 서랍장이 장대비에 젖고 있다. 시인은 그 버려진 것에 대하여 ‘이제 폐기장으로 가야 할/저 젖은 뼈’라는 연민의 눈길과 동시에 ‘빈 서랍장에는/그가 품었던 좋은 추억만 담겨 있다’라며 건강한 시선을 보낸다.

위의 시는 신향순 시인의 시집 『목요일에 비가 왔어요』에 실린 ‘서랍장’의 전문이다. 신향순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경상도 사투리의 강한 억양이 매력적이다. 시인은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학창시절까지 대구에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하면서부터 삼십 년의 세월을 수원에서 살아온 수원의 시인이다. 2014년 『문학저널』로 등단을 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시인의 특이한 이력은 행정학을 비롯하여 자그마치 여섯 가지나 전공을 바꾸어 가며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다는 점이다. 시인의 시가 다양한 관심을 보이고 그만큼 폭넓은 공감대를 지닐 수 있는 자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017년 유방암 판정을 받으면서 한때 주춤하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으면서 2021년 『미네르바』로 재등단을 하고 그 누구보다도 왕성한 시작과 더불어 문단 활동을 하고 있다. 

우기인 까닭이다. 시인의 시집을 꺼내 읽다가 그래서 고른 시가 비에 젖은 서랍장이다. 살림살이 중에 짐이 되는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버리더라도 비가 오지 않는 날을 가려 버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비에 젖은 폐기물들은 보기도 좋지 않고 그것을 수거해가는 분들도 무거운 만큼 힘이 든다. 

건강을 회복하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보기 좋다. 강한 에너지에서 빚어진 시들을 읽는 기쁨도 쏠쏠하다. 다음 시집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신 시인. 장마가 지나고 뽀송뽀송한 날, 날 잡아 차라도 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