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79)] ‘노을의 메아리에/귀 기울여 들어보라’
모든 시의 정황과 사연에도 드러나지 않거나 못한 그 과거가 있다. 시인이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고 독자도 굳이 추정해볼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어떤 시들은 독자들이 언표 이전의 상태나 생각을 추정하며 읽고, 공감 여부나 정도에 스스로 영향 받기도 한다. 다음 시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보인다
누더기뿐이지만
촘촘하면서 가볍게
견뎌 온 삶이다
맨손으로 왔다가
떠날 때는 남김없이 떨구는 나무
이따금 검은 흐느낌도 있지만
씨앗이 되거나 거름이 되거나
모든 행위는 성스러운 것
노을은 지는 게 아니라
새벽을 견인하는 것
살아 있는 한
향기로 피어나고
뿌리와 잎으로 영글어간다
숨 쉬는 건
언제나 자국을 남기는 일
노을의 메아리에
귀 기울여 들어보라
노을을 넘기는 건
성스러운 일이다
「거울」/이현섭
‘한 그루의 나무가 보인다’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또한 화자가 현재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는 화자 의식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데, 이 의물화 환유를 활용한 형상화는 낙엽귀근(落葉歸根) 양상으로 연속되어 낯익다. 하지만 그 세부를 살펴보면 기존의 그것과 결이 다르다. 낙엽귀근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그 죽음은 만추에 나무의 잎이 아래 뿌리로 떨어져 지듯, ‘결국 자기가 본래 났거나 자랐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회귀, 즉 환원(還元)이 그 취지이다.(죽음도 자연 질서의 일부라는 뜻도 포함하여) 그런데 이 시의 6행, ‘떠날 때는 남김없이 떨구는 나무’에서 알 수 있듯, 주체가 잎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무’이며, 8행 ‘씨앗이 되거나 거름이 되거나’에서 알 수 있듯, 잎보다 열매가 더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14행 ‘뿌리와 잎으로 영글어간다’에서, 나무의 미래에 연결되어, 뿌리를 북돋고 새 잎의 성장과 성숙에 기여한다는 화자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낙엽귀근에 환원만이 아니라 이런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이는 시인의 강조에 해당하며, 우리는 별도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시 2-3행 ‘누더기뿐이지만/촘촘하면서 가볍게/견뎌 온 삶이다’란 화자의 자기현시, 자신의 이 지난 삶 회고를 우리는 어떤 변명에 가까운 무미한 자부로 여길 수 있겠고, 자신의 노년 현재를 ‘노을’로 은유하며 ‘노을은 지는 게 아니라/새벽을 견인하는 것’이라는 의의 부여에, 이를 인정하면서도 그리 감명을 받지 못해 난처할 수 있겠다. 만약 그렇다면 한번 재고하였으면 한다.
이 시에서 화자가 자신의 삶을 그렇게 게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타인에게 권유하거나 교훈을 주려고 하지는 않는 듯하다. 17-18행 ‘노을의 메아리에/귀 기울여 들어보라/노을을 넘기는 건/성스러운 일이다’에서 그런 경향이 또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이 시의 초두 ‘한 그루의 나무가 보인다/누더기뿐이지만/촘촘하면서 가볍게/견뎌 온 삶이다’에서 알 수 있듯, 이 시의 진술은 화자가 자신을 상대로 의식하고 시도하는 독백성 발화이다. 그리고 우리는 화자가 그 이전에는 자신의 지난 삶을 그저 ‘누더기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추정할 수 있다. 짙어가는 노을, 삶의 짧은 끝자락이 진행되는 와중에, 화자는 비로소 자신의 삶이 꼭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자각은 ‘숨 쉬는 건/언제나 자국을 남기는 일’이라는 각성으로 이어지고, ‘노을의 메아리에/귀 기울여 들어보라’고 자신에게 타이른다. 다시 말해 ‘노을’은 노년에 이른 자신의 현재 상태이며, 그 ‘메아리’는 자신이 잘 몰랐거나 모르며, 상기하지 못하였거나 못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떠하였었고 어떠한지를 잘 알게 해준다. 그러니까 ‘메아리’는 객관화된 자신의 목소리이다. 또 당시에는 간과하였거나 파악하지 못했던, 산과 절벽, ‘메아리’를 조성하는 그것들의 정체와 처지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그간 자기부정이 서툴렀거나 과욕에 기인한 미숙이라고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마침내 자기부정이 부정할 수 없는 실상이라고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전자일 것이다. 7-9행 ‘이따금 검은 흐느낌도 있지만/씨앗이 되거나 거름이 되거나/모든 행위는 성스러운 것’이란 견해, 이에는 깊이 모를 늪 같은 반성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정당한 자부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행위는 성스러운 것/노을은 지는 게 아니라/새벽을 견인하는 것’에 뒤늦게나마 동의하며, 성속(聖俗)의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전율할 수도 있다.
사족 : 요양원에서 지내면서 혹시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또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시를 헌정합니다. 그 누구도 누더기 인생일 수 없습니다. 아니, 아니라면 그 누구도 누더기 인생일 것입니다. 그래도 누더기 인생이라 한다면 차라리 오히려 영광이겠습니다.
우리의 이 시대에도 문제가 많지만, 요양원살이를 포함하여 노년 삶 저하, 저출생만큼이나 심각한 문제지만 주변으로 밀려난 듯한 이 문제 개선에도 우리 모두 비상한 관심을 가집시다. 그 누구도 유종의 미를.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노을을 넘기는 건/성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