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그 중 가장 주목되는 견해로 널리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가 『시학(詩學)』에서 제기한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있다. “비극은 …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역대 비평가들은 ‘카타르시스’를 ‘정화(淨化)’로 새긴다. 그런데 정화되는 감정을, 관객이 비극 관람 이전에 내면에 고여 있는 유해한 불안과 우울 등이라고 하며, 그 감정들이 배출되어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 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비극의 효과를 강조하려고 심리 치유의 기능을 부각하려는 의도에서 제출되는 해석이 아닌가 한가. 과문에선지 모르지만, 배출 정화되는 감정은 관객 자신의 생활에서 야기돼 누적된 감정들이라기보다는, 비극을 관람하며 그 몰입에서 발생한 연민과 공포, 그 자체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참고로 연민은 참혹한 운명을 겪는 주인공에게 다가가는 깊은 동정의 정서이고, 공포는 그런 주인공으로부터 한사코 멀어지고자하는 배타의 정서이다. 이 두 상반된 정서는 여지없이 관객에게 팽팽한 긴장과 혼란을 조성하고 결말까지 지속된다. 막이 내린 이후에야 관객은 드디어 자신이 체험한 바가 실제가 아니라 실제일 수 있는 연극이라는 각성을 하고 새삼 미적 거리를 상기하며, 그 고양된 연민과 공포가 혼재된 복합 정서의 파고가 서서히 하강하는 마음의 상태를 겪겠는데, 그 과정과 회복의 심리를 지적한 언급으로 이해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3천여 그리스 비극 작품에서 백미로 추앙되는 작품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며 딸을 낳는 운명이 연출되는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왕」이다. 다음 시를 읽다가 어떻게 된 건지 문득 카타르시스가 상기되었고, 운운하다가 길어져서 죄송하다.
고요의 바다 속에 내 몸을 맡겨보면
육감으로 느껴 보는 포근함의 그 질량
스르르 단잠이 들 듯
밀려오는 그리움.
무중력 속에서 우주인이 걸어가듯
꿈속의 한 소년이 눈을 감고 걸어가듯
고요한 몽환(夢幻)의 세계를
걸어 보는 기척.
내 영혼 새로운 출구를 위하여
서서히 아주 서서히 마음 비워 가면서
있는 듯 없는 마음으로
유영(遊泳)하듯 걸어간다.
- 「고요 속에서」/김성수
우선 읽기에 이 시는 비극성도 없고 카타르시스를 적용해볼 대목도 없다. 오히려 이 시는 대립과 긴장을 해소하려는 저변의 동기로 명상을 기저로 하며, 대상에 몰입된 상태가 아니라 첫행 ‘고요의 바다 속에 내 몸을 맡겨보면’부터 끝행 ‘유영(遊泳)하듯 걸어간다’에 이르기까지 농도와 비중이 다르지만 화자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가 연속되는 두 대립되는 감정의 치열한 긴장이 없기도 하다. 화자는 ‘꿈속의 한 소년이 눈을 감고 걸어가듯’ ‘포근’한 ‘고요한 몽환(夢幻)의 세계’에 자신을 짐짓 밀어 넣는다. 역시 그렇다고 해서 무슨 최면의 상태를 조성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 파악하듯 이 행위는 바로 주체하기 어려운 일상의 욕망에 부대끼며 갈등과 죄책감으로 시달리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마음의 안정을 기대하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본성인 불심을 회복하려는 용의, 일종의 극기복례(克己復禮), 나의 안과 밖의 원수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랑을 초래하려는 지향과 유사하다. 그 무엇보다 3연 1행 ‘내 영혼 새로운 출구를 위하여’에서 우리는 그 기본 취지를 잘 승인할 수 있다. 또한 ‘내 영혼 새로운 출구를 위하여’, 바로 이 진술에서 우리는 차츰 카타르시스도 상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포근함’의 무게를 느낄 정도로, 갈등과 불안 같은 감정으로 착종된 마음을 비우고, 비운 상태. 이는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배출과 유사한 그 해소의 과정이 전제되어 있는 정화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스르르 단잠이 들 듯/밀려오는 그리움’일 것이다. 이 ‘그리움’의 대상은 무엇인가? 화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생략하지만 우리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화자가 ‘그쪽으로’ 가기 위해, ‘무중력 속에서 우주인이 걸어가듯’ ‘걸어가고 있’는 ‘고요한 몽환(夢幻)의 세계’는, ‘꿈과 환상과 같은 허황한 생각과 같은 세계’란 뜻도 있고, ‘모든 사물이 덧없는 현상의 세계’를 비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우리는 짐작한다. 화자는 그래서인가. 더하여 ‘작은 기척’을 내며 걷는다고 한다. 아마 자신을 격려하는 소리이면서 그 세계에 보내는 신호인 듯하다.
사족 : 그리스 전통의 비극에서 유래하는 정화와 동양의 종교와 철학에서 유래하는 정화를 대조 비교하려는 뜻이 없었지만 부득이 용훼하게 되었다. 그리스 문화의 정화는 타인의 비극을 간접 체험한 연후의 소산인 듯하고, 동양의 정화는, 나와, 나와 얽힌 세상의 부조리를 관조하면서도 덕성을 지표로 한 마음의 이월로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런데 이 시는 낙관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그 얼개에 과정의 치열성이 형상화되지 않고 있어, 니체의 견지에서 유감스러울 수 있다. 과분하지만, 과정과 대상과 이율배반(二律背反)의 자기모순도 노래하는 후속 시편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