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82)] ‘아늑한 실내등 아래 밥을 먹는 사람들’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시조(時調)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 민족이 공통의 리듬으로 형성하여 정립한 고유의 정형시 형식들 중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장르이다. 고려 14세기 말 이래 3장 6구 12음보는 조선 5백여 년 민족의 시심을 자극하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을 토로하는 창작을 촉진해 왔다. 20세기 초 서구지향의 조류에서 그 창작이 부진하였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 당대 문인들이 서구지향에서 ‘조선혼(朝鮮魂)’을 모색하며 민족지향으로 선회하고, 20년대 중후반에 국민문학운동을 전개하면서 시조를 중흥하였다. 당시에 3장3행을 기본으로 ‘연행(聯行) 갈이’를 시도한 다음과 같은 형태의 시조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 추구는 시조의 기존 리듬뿐만 아니라 독자의 메시지 이해와 이미지 인식과 어조의 질량 감지에도 미묘한 영향을 행사한다.   

 

매화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 「고매(古梅)」/조운(曺雲 : 1900-?)

 

 전통 시조의 3장3행 한 연을 세 연으로 구획하고, 각 연의 행도 의도와 사정에 따라 복수로 구분하며 독자의 주의와 음미를 인도하면서, 오랜 풍파를 견뎌온 매화나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아(高雅)한 견인의 지절(志節)을 은연 부각하며,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에서 보듯, 기존 매화 시에는 없는 듯한 고고(孤高)한 절제(節制)의 미덕을 최종 표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과유불급(過猶不及)에 가깝다고 할 종국에 우리의 인식이 도달하기까지 그 과정에서 기존과 다른 ‘연행(聯行) 갈이’가 직접 간접 그 한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일제 식민시기에 시조 창작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운동의 일환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같은 이념을 배경으로 경과하였는데, 근년 들어 세계화 시대 변화를 거치면서 시인들은 민족 표방을 사양하고 일부로 축소 내포하면서 지난날과 다른 취지에서 우리의 전통과 정체성을 담지하기에 이르렀다. 췌언이지만 현대 시조는 지난주에도 감상하였듯 그 메시지가 자유시의 그것과 대등하고 또 다양하며, 다음 시조에서 보듯 전통 율격과 형태에 그대로 종사하면서도 우리의 일상을 친근하고 실감나게 형상화하기도 한다.   

 

금이네 식당은 꽃집 옆에 열려있다

가던 길 멈추고 들여다보다 들어가는

아늑한 실내등 아래 밥을 먹는 사람들

 

된장국 냄새에 마음이 풀어지는

숟가락 소리에 마음이 겨워지는

모르는 사람조차 식구라 부르고픈

 

두부도 맛있네, 아빠의 부추김과

국물도 떠먹어봐, 엄마의 눈짓으로

아이의 작은 입술이 꽃잎처럼 벌어지는

 

꽃집 옆에 문을 연 금이네 식탁에는 

예쁜 아이 낳아서 밥을 먹여 주고 싶은

저녁의 풍경 소리가 그림처럼 담겨있다

                - 「금이네 식탁」/인은주   

 

 ‘금이네 식당은 꽃집 옆에 열려있다’고 시작하는데, 꽃집 옆이란 위치도 그렇지만[이도 일종의 비유 효과. ‘금이네 식당’은 ‘꽃집’과 같다...], ‘열려있다’란 상태는 벌써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다. 그 물리 차원의 상태만이 아니라 식당이 누구나 서로 친절하고 격의 없는 정서로 소통하는 가정과 같은 공간이라고 짐짓 시사한다. 이런 메시지는 그 2행, 사람들이 ‘가던 길 멈추고 들여다보다’ ‘들어’가며, 3행 ‘아늑한 실내등 아래 밥을 먹는 사람들’로 입증되고, 둘째 수 3행 ‘모르는 사람조차 식구라 부르고픈’이란 수식으로 최종 보완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조는 처음부터 시행들이 주거니 받거니 서로 그물처럼 엮여 진행되면서 의미가 부드럽고 천천히 정련되고 있다. 시행의 전개가 이러하지 않았거나, 친절과 소통이 그 가운데서 직접 언급되었다면, 현재처럼 은근히 미쁘고 평범하면서도 비범하다할 맥락이 조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한 식탁에서 마주앉아 식사하는 부부와 아이를 주목하게 된다. ‘아빠의 부추김’과 ‘엄마의 눈짓’으로 ‘꽃잎처럼 벌어지는’ ‘아이의 작은 입술’을. 그리고 ‘아이의 작은 입술’을 ‘꽃잎처럼 벌어지’게 하는 ‘아빠의 부추김’과 ‘엄마의 눈짓’을. 참 단란한 이 정경. 화자는 넌지시 아이도 꽃과 같고 부부도 꽃과 같지 않느냐고 속삭이는 듯한데, 당자이든 아니든 우리의 일상에 강림한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예쁜 아이 낳아서 밥을 먹여 주고 싶’어진다는, 이 시대의 ‘시절가조(時節歌調)’에 어울리는 소망을 알고서는 더욱 그런 심정이 된다. 게다가 그 표현도 아름답고 여운을 남긴다. 화자는 자신을 포함, 그 식당에서 식사한 사람들이 품게 되는 소망을 ‘저녁의 풍경(風磬) 소리’라고 은유하였다. 나아가 그 ‘아늑한 실내등’ 같은 소리가, ‘된장국 냄새에 마음이 풀어지’고, ‘숟가락 소리에 마음이 겨워지는’ ‘금이네 식탁’에 ‘그림처럼 담겨있다’고 하였다. 

 사족 : 이 땅의 젊은 독자들이 이 시조를 더 읽어주기 바랍니다. 여기서 ‘저녁의 풍경 소리’는 아마 은은한 조화의 소리일 것입니다. ‘꽃집’ 같기도 한 ‘금이네 식당’ 같은 식당에서 그런 소리를 품을 수 있기를. ‘가던 길 멈추고 들여다보다 들어가는’, 누구나 가고 싶은 식당. 식당을 경영하는 모든 분들께서도 이 시조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