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16)] 박복영 '장마'
장 마
박 복 영
며칠째였다. 양철 지붕 위의 비닐마저 물 먹은 듯 뚝, 뚝 비가 새었다. 누이는 받쳐놓은 세숫대야 옆으로 걱정처럼 튀어나온 빗방울들을 닦으며 말이 없었다 움켜 쥔 걸레에서 슬픔처럼 한 줌의 빗물이 쏟아져 나왔다. 양철대문을 열고 아버지의 젖은손이 두꺼운 구름들을 끌고 들어왔다. 일감을 얻지 못한 아버지의 연장 가방이 빗물의 무게만큼 무거웠을까. 아버지는 연신 마른담배만 피웠다. 햇살에 일어서던 마른 먼지들의 그리움이 마당을 가로질러 수채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눅눅해진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실직처럼 긴 지루함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장독대 시멘트바닥마저 퉁퉁 불었다. 칠월이었다.
비에 젖은 일상이 눅눅하다 못해 버겁게 무겁다. 시도 그렇다. 비에 젖어 무겁다.
박복영 시인이 2005년에 펴낸 시집 『햇살의 등뼈는 휘어지지 않는다』에 실린 ‘장마’의 전문이다. 정확지는 않지만, 시인의 청년 시절 어느 여름날의 회상이 시의 중심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장마철이다. 시는 마치 잘 찍은 한 편의 흑백영화에서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는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비가 오는 장마철이니 햇살이 비췰 리가 없다. 한낮인데도 방 안은 어두컴컴하다.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빗방울 소리만 자락자락 들릴 뿐이다. 그 소리보다 더 크게 울리는 것은 방 한가운데 놓인 세숫대야로 뚝, 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다. 흑백의 화면 속에 움직이지 않는 실루엣처럼 앉아있는 누이가 간헐적으로 천장이 새는 바람에 비에 젖은 걸레를 짠다. 영화를 보는 이의 마음까지 비에 젖는다.
방안을 비추던 카메라의 앵글이 양철 대문 쪽을 향한다. 아버지가 들어 온다. 아버지가 들고 들어온 것은 비에 젖은 연장 가방만이 아니었다. 두꺼운 구름들까지 끌고 들어왔다. 비 때문이었다. 일을 얻지 못한 것은. 가장의 어깨는 비에 젖은 연장 가방의 무게보다도 무겁다. 이때 카메라가 갑자기 아버지를 클로즈업 한다. 담배 한 개비의 값도 아쉽다. 차마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마른 담배만 피운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굵은 빗방울이 장독대 위로 쏟아지는 장면을 클로즈업 하며 영화는 천천히 페이드 아웃이 된다.
시 어디에도 시적 화자는 보이지 않는다. 화자의 감정을 조금도 노출하지 않는다. 시 속에 ‘슬프다’라는 말을 백 번을 써도 그 시를 읽는 독자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는데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게 좋은 시다.
기상청의 예보로는 8월 초나 되어야 올해의 장마가 끝날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수원의 날씨를 검색해 보니 다음 주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짜를 가리키는 숫자 위에 빗방울에 우산이 그려진 날들이다. 지난밤에도 폭우가 쏟아져 집필실로도 쓰는 내 사진관 바닥이 흥건하다. 얼른 글쓰기를 마치고 바닥부터 닦아야겠다. 그건 그렇고 박 시인. 지난 유월에 온다고 하더니 공수표네. 닭똥집에 소주 한잔 살 테니, 오셔.
박복영 시인
1997년 『월간문학』 시당선
경남신문,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송순문학상 외 다수 문학상 수상
시집 『구겨진 편지』 외 다수
시조집『바깥의 마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