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83)] ‘이곳엔 아픈 평화가 있다’
이제 요양원은 우리의 도시와 산야에 즐비하고, 우리의 부모와 친척과 지인들이 그곳에서 지내고 있어 조금도 낯설지 않다. 우리는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고, 방문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거나, 앞으로 그렇게 해야 할 것을 각오하고 있다. 그런데 요양원은 다만 우리에게 그런 공간에만 불과한가? 이런 자문(自問)은 한편 싱겁고 한편 은근히 자신을 짜증나게 할지 모른다. 어쩌란 거야, 가야할 신세가 되면 가야지, 때가 되면 에이 가면 그만인데 뭐 새삼스럽게 다른 대책도 없이 반문하듯 일깨우나?
그렇다. 우리도 결국 그곳으로 가야 한다. 곧 혹은 언젠가 노쇠와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져 스스로 돌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낳아 키우고 돌봐주었던 자손들과 며느리와 사위의 동의와 묵인 하에 우리의 부모나 친척과 지인들처럼 별 수 없이 어느 요양원이든 좋든 싫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떠밀리듯 가야 한다. 그런데 그런 요양원 생활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심정을 제대로 알거나, 알아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대충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그 삶의 종국 시공에 제대로 된 지정의(知情意)가 부족한 듯하다. 무엇에든 그렇기는 하지만.
요양원 생활을 다룬 다음 시를 그래서 우리는 거듭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의 제목이 「나뉘어진 삶」인데, 어떤 기준으로 생애를 구분하였는지 먼저 궁금하며 단언하기 어렵다.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요양원 생활 시작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여겨도 일리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우리에게 작지 않은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겠다.
먼 산에 눈이 쌓이고
요양원 뜰엔
내리면서 녹아 스며드는 눈
첫눈
조금은 설레보고 싶었는데
팔십칠세 어르신
이름은 이영애
나이는 오십
어르신 삶 속에
아름답던 시간이 오십이었을까
날마다 아기처럼 말하는 어르신
술주정뱅이 남편이 보고 싶다고
눈물 흘리시는 어르신
이쪽과 저쪽의 시간은
역으로 흐르고 있다
눈 내리는 날
이곳엔 아픈 평화가 있다
- 「나뉘어진 삶」/박연식
‘첫눈’ 내리는 어느 요양원 풍경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1연에서 요양원 사람들은 ‘첫눈’이 내려도 마음이 ‘설레’지 못하는 상태라고 한다. 진눈깨비 같은 눈도 눈이지만 우리 중 일부는 그 연세에 그건 당연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인지력과 감수성이 저하된 상태에서 그럴 개연성이 높겠다고 여길 수 있겠다. 즉 화자가 그 상태를 문제시하고 있지만 간과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는 이미 그런 반응을 의식하고, ‘첫눈/조금은 설레보고 싶었는데’와 첫 연의 행간에, ‘첫눈’은 우리 모두를 ‘설레’게 하며, 나이를 떠나 요양원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아니 더할 것이라는 전제를 은연 견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데도 그렇지 않아서 유감스럽다는 함축이 있다. 이 유감에 우리는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2연에서 ‘팔십칠세 어르신’ ‘이영애’ 여사라고 특정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1연과 그 이후 상황은 이 여사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이 여사와 동료들의 서로 비슷한 사연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2, 3연을 읽으며 이 시의 화자가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는 요양사를 비롯하여 그 직원이라고 추정할 수 있고, ‘팔십칠세’ 이영애 여사는 ‘오십’세 전후하여 ‘술주정뱅이’ 남편을 여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제목 ‘나뉘어진 삶’을 주목하며 요양원 생활 이전과 이후일 수 있다고 하였는데, 남편 별세를 기준으로 하여 그 전후라고 여겨도 일리 있을 것이다. 아무튼 ‘팔십칠세’ 이 여사는 최소한 요양원에 입소하면서부터 그 남편이 ‘보고 싶’어 ‘눈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도 시공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운명과 한계를 자각하고, 동정이 심화되면서 공포도 느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4연, ‘이쪽과 저쪽의 시간은/역으로 흐르고 있다’를 읽으며, 2연 ‘아름답던 시간이 오십이었을까’에서 그 ‘아름답던 시간’이, ‘술주정뱅이’ 남편으로 하여 그때는 괴로웠던 시간이었다고 번복 인식하게 된다. 2연의 ‘아름답던 시간’은 역설이 아니라, 그때는 술주정으로 괴로웠던 시간이었지만, 지금 회억하면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소회 표출이다. 그러니까 ‘이쪽[혼자 지내는 요양원]과 저쪽[부부가 동거하던 가정]의 시간은/역으로 흐르고 있다’에서 우리는 일어난 일은 하나지만 세월이 흘러 조건과 상황이 달라지면 인식과 정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치를 거듭 체관(諦觀)하며, 시속의 유행어 ‘있을 때 잘 해’라는 말도 상기할 수 있다. 더욱이 미묘 다단한 애증으로 복잡한 부부관계일수록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화자의 관찰에 따르면 현재 그래서 ‘첫눈’이 내려도 이 여사를 비롯, 요양원 사람들은 그저 ‘조금은 설레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다.
‘눈 내리는 날/이곳엔 아픈 평화가 있다’란 이 시의 결구는, 요양원 사람들의 그런 사연과 정서와 상황을 최종 정리하는데, 겉으로는 그리고 과거 그때와 달리 남편과 갈등이 없어 평화롭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평화는 어디까지나 그립고 쓸쓸한 평화이며, 그때는 지나쳤던 남편 사랑을 남편의 부재로 하여 선명하게 부각된 ‘팔십칠세’ 이영애 여사들의 ‘오십’세 내면의 모습을 우리가 잘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그 모습에 어디 남편만 있겠는가.
사족 : 요즘 ‘나이’ ‘오십’ 여성 어떤 분들은 의식과 자태가 기준이 좀 모호하지만 지난날 40대로 보이고, 어떤 분들은 무려 30대 후반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의 화자를 따라 우리 부모와 친지들과 지인들의 요양원 생활과 내면에 관심을 가집시다. 우리의 예정된 미래에 관심을 가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