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17)] 정 겸 '배롱나무'
배롱나무
정 겸
배추흰나비 한 마리 떠나던 날
뭇 사내들은 내 몸이 S라인이라며 칭찬을 했죠
매끈하다는 말 여러 번 들었어요
그리고는 내 허리와 겨드랑이를
간질간질 더듬고 지나갔죠
나의 흔들리는 몸매를 보고 모두들 즐거워했죠
보너스로 사랑한다는 말은 빼놓지 않더군요
아, 기억나는 것이 있어요
떠날 때는 향기 없는
꽃 몇 송이를 던져주고 갔지요
많이도 필요 없어요
누구라도 좋아요
땡볕 내리쬐는 한여름부터
된서리 내리는 가을까지
백 일 동안 나를 꽉 안아 주세요
내 여린 살갗에서 붉은 피가
송알송알 솟아나도록
피어있던 꽃들조차도 다 타들어 갈 것만 같은 한여름 땡볕 아래 새삼 홀로 붉게 흐드러졌다. 배롱나무꽃이다. 우람한 교목(喬木)이 아닌데도 한눈에 잘생긴 나무이다. 특히 나뭇가지의 자태가 여느 나무와는 다르다. 얇은 녹갈색 나무껍질이 조각조각 떨어진 자리에 맑고 매끈한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서 있다. 배롱나무가 유난히 절집에 많은 이유가 이 나무의 이런 모습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기왕 도량에 들었으면 스님들도 이 나무처럼 속세의 때를 말끔히 씻고 오로지 수행 정진에만 힘쓰라 하는, 뭐 그런 뜻이 있기 때문이란다.
시인은 시적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였다.
‘뭇 사내들은 내 몸이 S라인이라며 칭찬을 했죠/매끈하다는 말 여러 번 들었어요/그리고는 내 허리와 겨드랑이를/간질간질 더듬고 지나갔죠/나의 흔들리는 몸매를 보고 모두들 즐거워했죠’
배롱나무의 다른 이름 중 하나가 ‘간지럼나무’이다. 나무의 속살을 가만가만 긁으면 마치 간지럼을 타듯 나뭇가지가 흔들린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귀동냥을 하고 이 나무 앞에 서는 사람은 여지없이 나무에게 다가가 그런 시도를 한다. 아무런 사유도 없는 습관적인 행위에 시인은 반성을 요구한다.
‘보너스로 사랑한다는 말은 빼놓지 않더군요/아, 기억나는 것이 있어요/떠날 때는 향기 없는/꽃 몇 송이를 던져주고 갔지요’
우리는 너무 가볍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 호기심만으로 사랑을 남발하고 세속적인 요식행위로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아닌가. 그런 경박함에 시 속의 여성 화자는 참된 사랑을 간절히 원한다.
‘많이도 필요 없어요/누구라도 좋아요/땡볕 내리쬐는 한여름부터/된서리 내리는 가을까지/백 일 동안 나를 꽉 안아 주세요/내 여린 살갗에서 붉은 피가/송알송알 솟아나도록’
배롱나무의 다른 이름 중 하나가 ‘목백일홍’이다. 꽃밭에서 볼 수 있는 1년생 백일홍과 구분하기 위해 나무 목자를 붙여 목백일홍이라고 하는 것 같다. 아무튼 배롱나무꽃도 여름 석 달을 꼬박 붉게 꽃이 핀다. 그러니 분명 백일홍이다. 제물로 바쳐질 운명의 처녀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영웅이 떠나며 한 약속 -괴물을 퇴치하면 흰 깃발을,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고 돌아오겠다는.
배가 붉은 깃발을 달고 돌아오자 이무기의 목에서 나온 피로 깃발이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는 처녀가 자결을 한다. 그 넋이 기다린 백 일만큼 붉게 꽃으로 핀다는 설화를 변용시켜 시인은 ‘백 일 동안 나를 꽉 안아 주세요/내 여린 살갗에서 붉은 피가/송알송알 솟아나도록’이라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족이나 다름없는 감상은 달지 않도록 한다. 간절함과 기다림 그리고 사랑과 헌신에 대한 사유와 반성은 독자의 몫이다.
정겸 시인
- 본명 정승렬
-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 시집 『푸른 경전』, 『공무원』, 『궁평항』 등
- 공무원문예대전 행정안전부장관상, 경기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