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84)]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 덩이 뜨거운 피마저’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산문시 같으면서도 아니며 내재율과 호흡이 유려하고 긴밀한 시를 옮기고 나자 멀리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서 울던 소리보다 더 잘 들리다가 멈추었고, 다시 들리는데, 어떤 분이 자신의 몸을 줄에 매달고 아파트 창틀 유리의 짙은 먼지와 얼룩을 세척하고 지나간다. 무더위 때문인가. 시청한 현상이 잘 알 수 없지만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옮긴 시의 여운 때문이겠지. 1974년 정초 고교 시절에 읽어 낯설지는 않았지만 낯설기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

 무엇일까.

 나의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겁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나의 육체에서 꺼낸 것들은.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고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은 무엇일까.

 바람을 따라 한 없이 풀려나며 버려진 땅, 시든 풀잎, 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든가 날려가는 것들은.

 저것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시든 꽃잎들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고, 죽어있던 소리들이 이슬처럼 깨쳐나 나팔꽃 같은 귓바퀴를 찾아서 비상하고......

 

2.

 누님,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 저것들이 만나는 사물마다 제각기 내부를 열어 생명의 싱싱한 초산 냄새를 풍기고 겨드랑이 사이에 젖을 흘려서, 저는 더 이상 쓰러질 필요가 없습니다. 굶주려도 배고프지 않고, 병균들에게 빼앗긴 조직도 아프지 않습니다. 저의 캄캄한 내역마저 젖물에 녹고 초산 냄새에 스며서, 누님, 저는 참으로 긴 시간 끝에 때 묻은 시선을 맑게 씻고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봅니다.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노래합니다.

 

 격렬한 고통의 다음에는 선명한 빛깔들이 일어서서 나부끼듯이 오랜 주검위에서 더없는 생명과 빛은 넘쳐 오르지.

 열린 밤하늘과 수풀 있는 언덕에서 깊이 묻혀 깨끗한 이들의 희생을 캐어내고,

 바람의 부드러운 촉루 하나에도 

 돌아온 사자(死者)들의 반짝이는 고전을 보았어. 

 저것 봐. 열린 페이지마다 춤추는 구절들을.

 익사의 내 눈이 별로 박히어 빛을 퉁기는 것을.

 모든 허물어진 관절(關節)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질서를.

 

 내가 품었던 암흑의 사상은 반딧불 하나로 불 밝히고 때 묻은 활자들은 밤이슬에 씻어냈어.

 수시로 자라나는 번뇌는 은반의 달빛으로 뒤덮고

 눈부신 구름의 옷으로 나는 떠오르지.

 포도알들이 그들 가장 깊은 어둠마저 빨아들여

 붉은 과액으로 융화하는 밤이면, 그들의 암거래 속에서 나도 한 알의 포도가 되어 세계를 융화하고.

 

3.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무서운 저 광채 때문에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한 마리 야광충이 되어 깨어 있어야 하지. 저 광채 때문에 내 모든 부끄러움의 한 오라기까지 낱낱이 드러나 보이고, 어디에도 감출 수 없던 뜨거운 목소리들은 이 밤에 버려진 갈대밭에서 저리도 뚜렷한 명분으로 나부끼지.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 덩이 뜨거운 피마저 이 밤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 병든 나를 휩쓸지. 캄캄한 삶을 밝히며 가득히 차오르지.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 「회복기(恢復期)의 노래」/송기원(1947-2024)

 

 회복의 기운, 깊고 끈질긴 악성 질병을 아니 작은 감기를 앓았을지라도, 고통과 인내 끝에 마침내 역진하는 그 기운을 느꼈던 우리는 이 회복의 노래에 쉽게 공감할 것이며, 노래의 비상한 전개를 따라 우리의 의식도 부양될 것이다. 하강하는 고통과 번열, 그 차도로 편안해지는 약체. 쾌감이나 쾌락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안정된 일락(逸樂). 작지만 은근하고 황홀한 부활 유사한 기분이 몸의 심부에서 저며 들듯 상승하고, 재활의 운회(運回)에 감읍하는 안도의 심정. 더욱이 천형(天刑)과 같은 상실과 혐오로 훼손된 정신이 체류되고 있던 ‘무겁고 죄스러운 육체’라면, 그것까지 포함한 회복세는 참 다행할 뿐만 아니라 그저 평범한 조식(調息)일 수 없다. 

 이 시는 그러니까 육체뿐만 아니라 그 우울하였던 흑색 정신도 정화하는 몸의 노래다. 나아가 화자의 몸에서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고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무엇’, 즉 ‘보석과도 같은 광채’로 빛나기도 하는 그 명명하기 어려운 회복의 기운이, 화자의 병들었던 몸과 같은 화자 주변의 ‘버려진 땅, 시든 풀잎’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소생시키고, 나아가 ‘열린 밤하늘과 수풀 있는 언덕에서 깊이 묻혀 깨끗한 이들의 희생을 캐어’내고 있어, 화자의 자의식이긴 하지만 우리도 ‘모든 허물어진 관절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질서’를 보는 듯해, 우리의 심경도 경이에 가까워진다. ‘내가 품었던 암흑의 사상은 반딧불 하나로 불 밝히고 때 묻은 활자들은 밤이슬에 씻어냈어’에서도 마찬가지. 이외 이 시가 묘파한 그 파급의 상태들은, 모두 화자가 ‘사자들의 반짝이는 고전’, 그 ‘페이지’들에서 목도하는 ‘춤추는 구절’과 같으며, 다시 일일이 점검할 필요가 없겠다. 

 자신에게서 유출된 회복의 기운이 휘발하는 ‘보석과도 같은 광채’에 젖는 화자, 이 모습 등에서 우리는, 자기 동정과 탐미의 분위기를 지울 수 없고,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무서운 저 광채’, ‘저 광채 때문에 내 모든 부끄러움의 한 오라기까지 낱낱이 드러나 보이고, 어디에도 감출 수 없던 뜨거운 목소리들은 이 밤에 버려진 갈대밭에서 저리도 뚜렷한 명분으로 나부끼지’에서, 결벽증 배인 서로 다른 자기 과장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가 ‘포도알들이 그들 가장 깊은 어둠마저 빨아들여 붉은 과액으로 융화’하듯, ‘나도 한 알의 포도가 되어 세계를 융화하지’’라는 화자의 자변(自辨)을 우리는 주목하며, 그 인정을 유보하다가 그렇다, 비록 ‘암거래 속’일지라도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 덩이 뜨거운 피마저’ ‘안타까운 사랑’으로 승화하여 ‘캄캄한 삶을 밝히며’ ‘세계’를 ‘융화’하기를, 부디 그렇기를 ‘바람’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에 우리의 손가락을 걸고 적극 성원하게 된다. ‘긴 시간 끝에 때 묻은 시선을 맑게 씻고’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봅니다’고 자신과 사물을 우러러 찬탄하며,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노래’를 계속 하기를. 

 이 시는 자문자술(自問自述) 독백만이 아니라 2연 첫 단락에서 알듯 화자는 ‘누님’을 대면하며 자신의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고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라고 대화를 전제로 묻고 있기도 하다. 화자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직후의 의지도 의지지만, 그것들은 자신도 자각하고 있듯 따지고 보면, 자신을 지독하게 괴롭혀온 바로 그 질병의 참람한 기운이었기에. 이 사실이 자신도 아무래도 놀랍다는 그 강조일 것이다.  

 질병 앓던 몸. ‘신음’하며 ‘허물어’졌다가 그대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몸을 회복하고 격려하는 화자의 전변(轉變). 이 모습에서 우리는 한때의 우리를 보며, 미래의 우리도 본다.     

 사족 : 복학 시기가 달라서 70년대 후반 흑석동의 문학 광장이었던 할매집과 아지매집에서  보지 못 하였고, 그 이후에도 대면한 적이 없었으나 만나던 선배들 같던 시인 송기원이 지난 7월 31일에 이 풍진 세상을 떠났다. 이 시는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데, 심사위원 시인 이형기와 문학평론가 김우창이 심사평 첫머리에서 유례없이 “훌륭한 시를 낸 송기원에게 감사한다”고 하여 유명해졌다. 시인은 이후 시대와 일신의 갖가지 풍상을 또 겪었고, 어느덧, 상처와 갈등을 극복하는 명편들을 썼는데, ‘회복기의 노래’ 속편도 제시해주기를 바랐다. 거듭 명복을 빌며 이제 다시 곰곰 생각하니, ‘회복기의 노래’는 이 한 편이면 되었지, 다시 더 그 무엇을 더 바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