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윤 민 희
무너지고 남은 반쪽이
비스듬하게 서 있는 담장
부서진 벽돌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파인 땅을 지나
담장과 벽돌을 향하여 기어가는 나팔꽃 어린순
둘 사이를 이어주며
상처를 덮어주며 기어갈 것이다
비가 내려 줄기가 뒤집혀도 멈추지 않고
땅을 짚고 비틀면서 일어나
담장과 깨진 벽돌을 덮어 줄 것이다
마침내 혼자 일어서서 손뼉 치는 아기처럼
꽃도 활짝 피울 것이다
제 뿌리가 뽑힐 것을 알면서도
반듯하게 일어서라고
아침마다 나팔을 불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났다. 엄마가 정성스레 아침밥으로 차려준 꽁보리밥 한 그릇을 찬물에 말아 오이지 한 가지에 뚝딱 먹어 치우고 가방을 둘러메고 학교엘 간다. 앞에는 벌써 삼삼오오 짝을 지어 뭐라고 재잘거리며 학교로 향하는 친구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길가 풀숲엔 함초롬히 이슬이 내렸다. 꼭이나 누구네 담장이랄 것도 없다.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나팔꽃은 얼마든지 있다. 나팔꽃 꽃잎 위로도 내린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이다.
초등학교 시절 긴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 날 아침에 대한 막연한 회상이다. 이 무렵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나팔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 꽃을 보기가 쉽지 않다. 우리네가 살아가는 공간의 이음매 어디에도 흙으로 된 땅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읽고 나면 위안이 되는 시가 있다. 윤민희 시인의 시가 그런 시이다. 시인이 바라본 나팔꽃이 핀 곳은 재개발 예정지이거나 그야말로 낙후된 달동네 어디쯤일 것이다. ‘무너지고 남은 반쪽이/비스듬하게 서 있는 담장//부서진 벽돌이/바닥에서 뒹굴고 있다.’라고 하였다. 덕분일까. 역설일 수밖에 없는 축복이다. ‘파인 땅을 지나/담장과 벽돌을 향하여 기어가는 나팔꽃 어린순’. 파인 땅이 있기에 그 땅에서 나팔꽃 어린순이 나와 담장과 벽돌 사이로 넝쿨을 뻗고 있다.
위의 시는 시인이 2022년에 펴낸 시집 『책들이 나를 보고 있다』에 실려있는 ‘나팔꽃’ 전문이다. 시인은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열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공간에서 핀 나팔꽃이 ‘둘 사이를 이어주며 상처를 덮어주며 기어갈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 ‘비가 내려 줄기가 뒤집혀도 멈추지 않고/땅을 짚고 비틀면서 일어나/담장과 깨진 벽돌을 덮어 줄 것이다//마침내 혼자 일어서서 손뼉 치는 아기처럼/꽃도 활짝 피울 것이다’라고 한다.
그곳에서 살다 간, 혹은 살고 있는 주민들이 결코 사회적 강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려 보이지만 강한 생명력이 있기에 ‘뒤집혀도 멈추지 않고’, ‘비틀면서 일어’날 것이다. 이윽고 ‘담장과 깨진 벽돌을 덮’을 것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 내 어깨를 다독여준다면 그 다독임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그 다독이는 손길이 같은 어려운 처지의 누군가의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제 뿌리가 뽑힐 것을 알면서도’라고 하였다. 그곳에 핀 나팔꽃은 누군가의 손에 뽑힐 수도 있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반듯하게 일어서라고/아침마다 나팔을 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어디 있겠는가. 이게 시인의 눈과 가슴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에서 축복을 발견하고 그 축복을 모두의 위안으로 나눈다.
지금이 나팔꽃이 한창일 때이다. 그러나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둘러싸인 우리네 메마른 공간에서는 그 흔하던 나팔꽃 한 송이를 보기가 쉽지 않다. 윤민희 시인 덕분에 마음속으로나마 나팔꽃의 위안을 얻게 되어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윤민희 시인
시집 『엇박자』,
『그리움을 위하여 가슴 한 켠을 비워두기로 했습니다』
『책들이 나를 보고 있다』
동서문학상 외 다수 수상
경기도 문화예술진흥유공표창
오산문인협회 회장 역임
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