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85)] ‘공이 돌아가시매 만주(滿洲)가 텅 비었네’
광복 79주년을 맞이하여, 선열들께 여전히 부끄럽고 죄송하다. ‘한국은 경제 선진국’이라는 해외 학자들의 인정과 ‘2024 파리올림픽 종합 8위’ 성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족 북한과 노려보며 대치해야 하는 처지이고, 내부는 건국절 논란 등 여러 무용한 갈등과 분열을 겪으며 일제의 그 억압에 못지않게 시달리고 있다. 하루빨리 우리 모두 제대로 반성하며 귀일할 것은 귀일하면서 절충과 통합을 강조했던 선열들의 국가회복 뜻을 우리를 위하여 받들어야 한다.
해방 12년 전이었던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그해 4월 13일에, ‘만주의 호랑이’이자 ‘통합의 화신’이라 불리던 한 원로 독립운동가가 마포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향년 아니 세수 59세. 1931년 10월에 밀정의 밀고로 하얼빈에서부터 영어의 몸이 된지 6년, 1911년 4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무력을 양성하여 국내에 진공(進攻)해 일제를 현해탄 너머 섬으로 몰아내겠다는 신민회의 독립운동 방략에 진영 통합을 병행하며 일관 헌신한지 27년, 위정척사(衛正斥邪) 선배 유림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의 자산을 기반으로 한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 설립과 운영에 기여하며 본격 구국운동에 나선지 어언 30년이 되던 해였다.
일송은 면회 온 아들 김정묵에게 미리,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는 유언을 남겼고(1934년에 늑막염으로 신음하며 “내가 죽을 여기는 풀밭이나 산중에서 죽은 유명 무명 동지들을 생각하면 ‘과분한 장소’”라고 한 회포의 후속), 이에 따라 유족과 제자들과 지인들은 일송이 떠나온 고향으로 운구하지 않고 4월 18일에 화장하고 유분을 한강에 뿌렸다. 이날 오전에 빈소가 있던 심우장(尋牛莊)에서 영결식이 있었는데, 장례를 주선하던 『님의 침묵』(1926)의 대시인이자 철벽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사가, 여운형, 홍명희, 방응모, 이극로, 이인, 허헌 등 당대 50여 인사들이 추도하는 가운데 유례없이 대성통곡하였다. 시봉하던 제자 김관호가 의아하여 물었다. “필자[김관호]가 종용히 물으니, 선생[만해] 말씀이, ‘유사지추(有事之秋)가 도래하면 이 분이 아니고는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한다. … 일송을 잃는 것은 전 민족의 큰 손실이요, 장래의 큰 불행’이라고 단언하셨다. … 그 후 8.15를 만났으나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 단합이 안 되고 계속 투쟁하는 것을 보며 8년 전 예견한 그 말씀이 적중한 것을 느끼었다.”(김관호, 〈일송 김동삼 장례〉, 만해사상연구회 김관호·전보삼 편, 《한용운사상연구 제2집》, 민족사, 1981. 09. 300-301쪽) 만해의 이 비통한 말은 만해가 일송 영전에 헌정한 만사와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우리가 일송의 옥사와 장례에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언급이 있다. 당대 거인들 중 한 분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 1879-1962 : 1919 파리장서운동 기획‧성균관대 설립‧자유당독재 반대운동)이 부음을 듣고 일송의 국궁진췌(鞠躬盡瘁) 대장정을 기리는 만사를 썼다. 당시 심산은 일제의 고문으로 척추가 부러진 몸을 울산 백양사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公在鯷山重(공재제산중) : 공이 계시매 제산이 무거웠고
公歸滿洲空(공귀만주공) : 공이 돌아가시매 만주가 텅 비었네
却將雲雷志(각장운뢰지) : 아, 구름과 우레 같이 비상하고 변화 큰 그 경륜들
歛去一木中(염거일목중) : 거두어져 공과 함께 한 그루 나무 가운데로 들어 가버렸네
公去知己盡(공거지기진) : 공이 가시매 지기가 없어졌고
宇宙廓然空(우주확연공) : 우주가 사뭇 텅 비었네
我生生何樂(아생생하락) : 나 살아있으나 살아봤자 이제 무슨 낙이 있으랴
狂號海窖中(광호해교중) : 바닷가 굴속에서 미쳐 울부짖노라
- 「만김일송동삼이절(挽金一松東三二絶)」(『국역 심산유고』, 국역심산유고간행위원회, 1979, 3. 73-74쪽. 권말 31쪽)
첫 수에서 심산은 일송의 인품과 역량을 기렸다. 1행에서, 제산(鯷山)은 ‘해동(海東)’과 같이 ‘조선’의 다른 이름인데, 일송의 활약도 있어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이 나라 망한 식민지 조선을 무시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와 연계된 2행에서, 일송의 옥사는 새삼스럽지만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이 공허해질 정도로 크나큰 손실이었다고 탄식한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에게 낯설지만 그저 지나친 과장이라 하기 어렵다.
일송이 옥사하자 우파 계열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 좌파 계열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앞길』, 그리고 중도의 미주(美洲) 《신한민보》 등은 간곡한 추도 기사와 추도문을 실었다. 동해수부(東海水夫) 홍언[洪焉 : 홍종표(洪宗杓) : 1880~1951. 1995년 독립장]은 「한국혁명당 령수 김동삼 선생의 서세」에서, “왜적이 보는 선생의 권위는 수십만 군사보다 더 무서운 것이고, 또 수천톤 작탄(炸彈)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 그런고로 왜적이 늘 선생을 꺼리더라. … 아! 선생이 어떻게 이같이 위대한 권위를 가졌는고? 이는 다만 철저한 주의 하에 탁연 특립한 용맹이 사생에 잡고 있는 정의. 즉 대한 민족의 옳은 것이라. 선생이 이같이 위대한 권위를 가지고 제반 무장 동지로 하여금 련합정신을 재조(再造)하여 늘 왜적을 대항하였고, 또 왜적을 박멸할 터임에 왜적이 그 밑에서 전율하다가 만주 침략에 나와 대병을 동원하기 전에 마저 선생을 방비한 것이라.”(《신한민보》, 1937년 6월 17일자)고 기렸다.
한편 같은 시대의 동지이자 후배이며 박은식(1859-1925)의 역사정신을 잇기도 한 김승학(1881-1964)은 「남만의 맹호 김동삼」(『세대(世代) 1972년 3월호 전재)에서 “흔히 우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하면,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 등의 무장활동을 내세우지만 문무를 겸했던 항일운동의 거목 김동삼의 활동은 자칫 망각되는 경향이 있다”며, “그는 민족 수난기를 통해 많은 독립운동 조직을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순난(殉難)의 길로 입신하여 투쟁했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운동사상 그가 남긴 업적은 실로 위대성(偉大性)에까지 육박하고 있다. 일찍이 중국 본토로 망명, 상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갖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한 김구의 활동과 더불어 김동삼은 남만의 밀림을 근거로 일제에 대한 과감한 무장투쟁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는 만주에서 활약한 한국 독립운동가로서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고 평가하였다.
3행에서 ‘雲雷志(운뢰지)’는 일송이 비상하고 뜨겁게 지속한 그 ‘독립운동 조직’ ‘지도’나 참여를 비유한다. 즉, 경학사(1911), 신흥학교(1911), 부민단(1912), 비밀군영 백서농장(1914), 무오독립선언(1919), 임시정부 의정원(1919), 한족회(1919), 서로군정서(1919), 신흥무관학교 확대 운영(1919) 신흥무관학교 군사훈련 교관단 북로군정서 파견(1920. 2) 통군부(1922), 통의부(1922), 국민대표회의(1923), 정의부(1924), 3부 통합운동(1928), 혁신의회(1928), 민족유일독립당재만촉진회(1929), 남북만주한족총연합회동맹(1929), 재만농민동맹(1929),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창립주비회(1930),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1930) 등, 1931년 피검 직전까지 시대의 여건에 따라 오직 독립 쟁취를 위해 과감하게 변화하고 강력하게 추진한 이력을 포괄하고 있는데, 3행에는 이제 이 모든 지향과 실천이 옥사로 하여 더 기대하지 못하게 중단되고 말았다는 깊은 탄식이 4행에 연계되어 이미 배어있다. 4행, ‘一木(한 그루 나무)’은 아마 나무로 짠 관을 가리킬 것이다. 혹은 외롭게 선 ‘一松(한 그루 소나무)’ 그 자체로, 일송의 영혼과 활동이 그 한 그루 소나무로 무연히 환치되고 말았다는 회한의 피력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수는 취지도 취지지만 그 구조도 탁월하다. 2행과 4행의 각운뿐만 아니라, 1, 2행의 서로 다르며 대등한 대조는 3, 4행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면서 충정(衷情)을 넘치지 않게 절제하는 안정을 이루고 있다.
둘째 수는 이상에도 불구하고 심산이 이 이승에서 일송과의 소통과 우정이 끊어진 상황을 낙망과 더불어 절감하고 자신의 저변 상태를 피력하는데, 역시 일송을 기리려는 의도에서이다. 1행에서 심산은 일송이 자신을 알아주는 드문 지기(知己)였다고 추억하며 그리워한다. 심산은 1919년에 부의장으로, 위원이었던 일송과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여 헌장을 제정하는 등 임시정부를 세웠다. 같은 해에 만주 유하현을 중심으로 부민단을 확대한 한족회가 예하에 설치한 군정부를 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로 개편하고 석주 이상룡을 독판에, 일송을 참모장으로 취임하게하자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에 취임하여 협력하였다. 1923년 상해 국민대표자회의에서 일송이 의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위원으로 선정되어 일송과 긴밀한 협의를 거듭하였다. 이후 두 분은 헤어졌다. 일송은 만주로 돌아갔고, 심산은 북경과 상해에서 활동하다 1927년에 피체되어 국내로 송환되었고 일제의 고문으로 걷지 못 하게 되었다가 1934년에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두 분은 오래 상면하지는 못하였지만, 지기상통(志氣相通) 지기(知己)의 정서는 분명 지속되었을 것이다. 2행에서 그 상실을 거대하게 형상화하고 있는데, 그 공허가 어떠한 상태인지 잘 표출되어 있다. 3행은 그래서 더 살고 싶지 않다는 한탄, 4행 ‘바닷가 굴속’ 미친 통곡은 격심하게 점증되는 애상(哀傷)을 폐쇄 상태와 다르지 않은 공간에서 도저히 자제할 수 없다는 자기 방기(放棄).
이후 심산은 해방을 맞아 성균관대학교 창립(1946)을 주도하였으며,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며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굴의 의리지사(義理志士) 심산에게 1961년에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람을 보내 나라를 위해 당장 처리해야 할 시무가 무엇이냐고 묻게 하였다. 심산은 일제 하 독립운동을 평가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호통 치듯 피력하였다. 1962년 2월에 국사편찬위원회는 세 등급 서훈을 결정하였는데, 생존자로 유일하게 중장(重章 : 1등급)을 받은 심산은 병상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정부가 발표한 명단 중에는 왜경에 투항한 자도 끼어있고, 마땅히 중장을 받아야 할 사람이 복장(複章 : 2등급) 수상자로 결정되는 등 논공행상에 미흡한 점이 많다”, “복장 급 포상자 중 李東寧(이동녕, 상해 임시정부 4대 대통령) 선생과 상해에서 국민대회를 열 때 의장을 지낸 金東三(김동삼) 선생, 「海牙(해아) 밀사 사건」으로 유명한 李相卨(이상설) 선생은 중장을 받아야 마땅하다”(《동아일보》, 1962년 2월 28일자)고 하였다. 심산은 “시정을 하려면 수상하기 전에 시정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2024년 현재까지 시정되지 않고 있다.
보훈부는 지난 4월에, 1962년 이래 제기된 서훈 저평가 분들에 관련된 오랜 국민의 여망을 헤아려 ‘독립운동 가치의 합당한 평가’를 ‘학계 전문가 연구 등을 거쳐 독립유공자 공적 재평가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이번 기회에 세 분을 위시하여 같은 사정에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그간 미편했던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추가 공적만 살피지 말고, 1962년에 심의하였던 공적도 이후 발굴된 당대의 평가들과 후대 학자들이 조명한 그 의의도 검토하여 서훈 조정에 적극 반영하기를 기대한다.
예나 지금이나 공정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은 국가 기강의 기초이며 현재 우리 젊은 세대가 가장 우선시하는 사회통합의 조건이기도 하다. 국가의 미래지향 동력 확보에서는 더욱 유력한 명분이라는 사실을 모든 역사가 증빙하고 있다. 보훈부와 위원회의 재평가가 무난히 잘 이루어져, 우리의 애국애족 의식을 고양하고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는 통합에 유력한 새 지표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