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21)] 최연숙 '밥차리미 시인의 가을'

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

 

밥차리미 시인의 가을

                        최 연 숙

 

끊임없이 내려앉는 느티나무 잎 사이로

닭 울음소리 길게 퍼지고 순한 개가

기다림도 없이 앉아 있다

간간이 서너 집씩 모여 살아도 산중에는

골마다 이름이 있어

느티나무골

쌀밥보다 비싼 보리밥을 먹겠다고

여자랑 남자랑 느티나무 밑에서

낙엽을 맞으며 나물보리밥 비비는데

오는 사람마다 밥상 차려주는 시인은

떨어지는 느티 잎으로 시인은

가을 해를 비빈다

보 · 고 · 싶 · 다, 가 · 고 · 싶 · 다 따위의 단어들을

부수어 넣고 시인은 가을 바람을 비빈다

우는 닭과 함께 순한 개와 함께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등을 보내며 시인은

가을을 비빈다

 

신화 속의 페가수스는 날개가 달린 말[馬]이다. 그 말의 주인은 시와 음악을 관장하는 시인 뮤즈이다. 얼핏 말에 날개가 달렸으니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땅을 달릴 수도 있으니 좋을 것도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아무리 하늘을 날 수 있어도 그가 일용할 양식은 지상에서 구해야 한다.

그렇다. 시인의 영혼이 아무리 천상을 꿈꾸어도 어쩔 수 없이 육신은 지상적 존재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먹고 사는 일이 제일 무섭다. 시인은 생계를 위해서 오늘도 일을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말 속에 도우미라는 말이 슬쩍 들어와 앉았다. 동사 ‘돕다’에서 파생한 명사 ‘도움’에 다시 접사 ‘이’를 붙여 ‘돕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자리 잡았다. 그런 일련의 조어과정을 살펴보면 ‘밥차리미’라는 말의 뜻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밥을 차려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게다. 시인은 오늘도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닌 밥상을 차리고 있다. ‘오는 사람마다 밥상 차려주는 시인’이라고 했다. 노동이다.

‘간간이 서너 집씩 모여 살아도 산중에는/골마다 이름이 있어/느티나무골’이다. 시인이 일하는 밥집이 있는 곳이다. 세상 좋아졌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집에 멀쩡한 쌀밥을 두고 굳이 이 골짜기까지 찾아들어 ‘쌀밥보다 비싼 보리밥을 먹겠다고/여자랑 남자랑 느티나무 밑에서/낙엽을 맞으며 나물보리밥’을 비비고 있다. 

그 밥상을 차려주다 말고 시인도 문득 무엇인가를 비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들의/등을 보내며 시인은/가을을 비빈다’ 그렇다. 가을을 비비면 된다. ‘떨어지는 느티 잎으로 시인은/가을 해를 비’비는데 읽는 이는 이쯤에서 가슴이 아리다. 보리밥을 비비려면 온갖 나물과 참기름 등속이 필요하겠지만 가을은 무엇을 넣고 비벼야 하나. ‘보·고·싶·다, 가·고·싶·다 따위의 단어들을/부수어 넣고 시인은 가을 바람을 비빈다’고 했다. 보고 싶은 이들의 이름과 가고 싶은 곳들에 대한 그리움을 부수어 넣고 가을 바람에 비비는 시인.

위의 시는 최연숙 시인이 2012년 연말에 펴낸 시집 『밥차리미 시인의 가을』 표제시이다. 새해인 2013년이 시작되고 며칠 안 지난 어느 추운 겨울날 남문 뒷골목의 선술집에서 건네받은 시집이다. 나도 시인의 곤고한 일상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시집 속에는 아프고 쓰라렸던 시인의 지난날과 이어지는 일상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만큼 그 어떤 수사적 장치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시집이다.

여전히 덥다. 제까짓 더위가 기승을 부려봐야 얼마나 더 가겠어. 곧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느티나무 잎을 떨구는 가을바람이 불겠지. 최 시인. 까짓거 어차피 불 바람 조금 먼저 오라고 불러들여 눈물처럼 맑은 소주잔에 불게 해 봅시다. 조만간 서문 로터리 선술집에서 간만에 ‘보·고·싶’던 몇몇 얼굴 불러 ‘가·고·싶’은 얘기 나누며 한잔 합시다.

 

최연숙(본명 최희명) 시인

월간 『예술세계』로 등단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밥차리미 시인의 가을』, 『청소골 편지』